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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이월 Sep 03. 2022

맨해튼에서 빨간불에 길 건너기

뉴욕 여행 2일차


맨해튼 곳곳이 공사중이었다. 안 그래도 즐비한 고층 빌딩, 수많은 사람들과 차로 번잡한 도시는 안전을 위한 바리케이드까지 더불어 더욱 혼잡해졌다.                


세계 최대의 도심에서 사람들은 차가 오지 않으면 빨간불에도 서슴지 않고 거리를 건넜다. 미국에 도착한 첫날, 나는 꿋꿋하게 보행 신호를 기다렸다가 건넜다. 이 나라의 법규를 잘 지키는 안전한 여행객이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나름대로의 이유로.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생긴 건 아마도 입국 심사 때문일 터다.   

             

미국의 입국 심사가 굉장히 까다롭다는 건 익히 접해 잘 알고 있었다. 긴 입국 심사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덜 까다로울 것 같은 심사관을 찾아내려 했다. 심사관들의 눈은 이 나라에 방문하는 여행객을 환영하기보다는, 혹여나 불법적으로 체류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보이는 사람을 찾아내려는 듯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행이나 출장 등의 합법적인 목적으로 미국에 왔고, 정해진 기한에 떠날 것이며,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고자 심사관에게 미리 출력한 비행기 왕복표며 숙소 예약서 따위를 내밀었다. 책잡을 건 없어 보이건만 심사관들은 간단히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 역시도 심사관에게 나는 미국에 우호적이고, 미국의 문화와 예술을 즐기러 왔고, 불법적인 행위를 하지 않을 사람임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왜 왔어요?”     

- 여행하러요.     

“미국에 얼마나 머무르죠?”     

- 한 달 정도요.      

“직업이 뭐죠?”     

- 글을 써요.     

“작가인가요? 무슨 글을 쓰나요?”          

     

심사관의 눈빛이 예리해지고 질문이 쏟아졌다.         

      

“장르가 뭔데요?”     

“그게 무슨 내용이죠?”     

“책 이름이 뭐예요?”     

“영어로 볼 수 없어요?”     

“필명으로 썼다고요?”         


심사관에게 얘기할 직업으로 전 직장과 작가 중에서 고민을 했다. 직업이 없는 상태를 심사관들은 굉장히 경계한다고 했기 때문에 현재 직장을 다니지 않는 백수라는 입장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었으나,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직감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심사가 시작될 때부터 내 옆에 통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세 곳의 입국 심사대를 돌아다니던 통역사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심사를 기다리고 있던 내게 심사가 예상보다 너무 길어지고 있다며 빠른 심사를 위해 통역을 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있었나 보다. 정확했던 그의 판단! 나는 냉큼 “네!”하고 대답했다. 그때 마스크 속의 내 입은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사관의 질문에 대한 내 답을 통역사가 전해주면 심사관은 말없이 내가 내민 서류를 뒤적거리고, 모니터를 보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과정을 몇 번을 반복했을 때 심사를 기다리던 내 뒤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저분이 좀 까다로운 것 같아요.”           

    

기나긴 심사를 통과하고 숨을 돌리는 내게 통역사는 위로하듯 말했다. 통역사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나는 세컨더리룸으로 갔을 것이다. 미국 여행 첫날부터 은인을 만났다. 감사해요. 정말.       

        

내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한 권쯤은 책날개에 사진을 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미국땅을 밟았다. 미국의 법에 저촉하면 안 된다는 방문객의 의무를 부과받고 어렵게 입국을 했으니, 미국에 온 첫날부터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게 찜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찜찜한 마음은 단 하루로 그치고, 이튿날부터 가끔은 사람들을 따라 빨간불에도 건너게 됐다.           

          

‘어째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교통 법규를 어기는 거지? 신호등은 질서를 위해 만들어놓은 약속 아닌가?’        

  

년 전 첫 여행지였던 로마에서 무단횡단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걸 보며 들었던 의문. 삼 년을 살았던 호주에서도 사람들은 쉽게 교통 법규를 어겼다. 소송의 나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 차보다 보행자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빨간불에 건너는 사람들에게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과 가장 맞닿은 법규인 교통 법규가 무시되는 걸까. 아니면 보행자 우선주의의 나라에서 보행자로서 실시간으로 보호받는 걸까. 법적 의무와 약자 보호 사이의 공백은 저마다의 해석으로 소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럴 때 영화 『원더』의 문장을 떠올린다.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할 때는 친절함을 선택하라.                    


옳음을 선택해야 하는 근거들은 타당하다. 옳음을 지지할 때는 회개할 게 없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친절함이 필요한 사람들 곁에 서자고 마음먹는다. 나를 지탱해준 사람들 중에서는 옮음과 친절함 사이에서 친절함을 택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존재한다. 눈에 띄지 않아도 그들의 보살핌은 강력했다. 내 가족과 내 나라와 내 스승이 미처 돌보지 못한 이음새들을 단단하게 조여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법규를 어겨야만 전달되는 목소리와 법적 의무를 저버려야 발견되는 존재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내일도, 모레도, 내년도, 그 이후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알아야 할 게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의 배움은 친절함을 택한 자들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뉴욕에 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 내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 말을 적용하지 말 것.     

그러니 앞으로 남은 일정 동안 나는 우두커니 서서 보행 신호를 기다려볼까 한다.                      



+ 편지는 아니지만 추신.      

이 글은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썼다. 뉴욕 여행을 계획하며 내내 바던 순간이다. 기대했던 것만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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