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 살, 세상에 태어난 나를 만나다.
[으아아앙---!]
279일. 엄마라는 사람의 뱃속은 따스했어. 나는 5일 전, 세상에 태어났는데, 궁금하고 하고픈 말도 많지만,
이거 웬걸?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우는 것 밖에 없네. 젠장.
아. 세상에 태어나니 좋은 건 뭐냐고?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불편한 게 몇 가지 있는데 들어봐.
첫 번째, 너무 심심하다는 것.
두 번째, 매우 졸리다는 것.
세 번째, 응가를 싸면 너무 찝찝하다는 것. 이 정도?
이 나이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인가 봐. 에휴.
근데, 오늘은 뭔가 좀 이상하다. 항상 어두컴컴했는데 오늘은 환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오네? 그것 때문에 머리가 띵해서 몇 시간을 우는지 모르겠다.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게 이렇게 힘들고 아픈 일이라니 에휴.
그나저나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가능하면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뱃속에서 엄마, 아빠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독하게 못 사는 집 같다. 아휴.
오! 조금씩 앞이 보인다.
"으아아아앙! (오. 대박. 신기하다.)"
어? 누구지? 이 사람이 우리 아빤가?
당신 인생의 첫 기억은 언제인가? 나는 3살 정도로 기억하는데, 썩 좋은 기억은 아니다. 무슨 일이냐면, 오랜만에 집에 온 할머니에게 장난으로 칫솔을 집어던졌는데, 이걸 본 아빠가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때렸다. 다행히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한테 맞은 일이다.
과거로 더 멀리 갈수록, 즐겁고 기쁜 일 보다 상처된 일이 잘 떠오른다. 분명히 즐거웠던 일들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인생에서 아픔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길 잃었던 어린 시절 나는 집에 잘 찾아갔는지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과거가 변하면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는데, 이렇게 아무 일 없는 걸 보면 과거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과거를 여행하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스무 살부터 다섯 살까지. 나는 계속 먼 과거로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섯 살 이전이라면... 이번엔 아빠한테 혼난 날로 가는 건가?"
오전 내내 쓰던 원고를 저장하고 나는 노트북 전원을 껐다. 그리고 안방으로 걸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이제는 익숙한 그 몽롱함이 밀려왔다.
손바닥을 봤다. 점이다.
[으아아앙----]
[으아아앙잉아앙----]
[아아앙앙!!!--]
"으악."
갑자기 수많은 울음에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투명한 유리창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갓 태어난 아기들이 투명한 케이스 안에서 울거나 자고 있었다.
"어머! 얘 어쩜 이렇게 엄마랑 똑같이 생겼니?"
"야~ 이놈 코 오뚝하네~"
"허허... 이때 못생겼더라도 크면 예뻐지더라"
.
.
.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아기들의 친인척과 친구들은 저마다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마다 하는 말은 달랐지만, 갓 태어난 작은 생명체에 경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오늘은 어떤 날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잠깐, 신생아라니 혹시...?
"허허, 무얼 그리 생각하고 있나?"
반들반들한 대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할아버지. 50년 뒤 나다. 인기척을 느낄 새 없이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하고 있었다. 깜짝 놀람과 반가움으로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어! 할아버지!"
"허허~"
할아버지도 다른 이들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 테지? 그리고"
"네? 그리고?"
"지난번에는 집에 잘 찾아갔다네. 그래서 아무 일 없는 것이고."
할아버지는 내 생각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 어깨에 올리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옆쪽으로 걸어갔다.
"할아버지, 오늘은 제가 태어난 날인가요?"
"아니, 며칠 지났다네. 이제 만나러 가볼까?"
[똑똑-]
"허허, 수고 많으십니다. 여기 애기 아빠 데려왔어요."
"아~ 잠시만요~"
"나는 들어갈 수 없네, 그러니 잘 만나고 오라고."
잠시 후, 병원 간호사가 손바닥 보다 조금 큰 작은 아이를 가져왔다. 품에 안아보니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보다 가벼웠는데, 이 작은 얼굴에 눈, 코, 입 모두 들어가 있는 게 신기했다.
"이게... 나라니..."
그때, 내 품에 안긴 나는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고 우린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삐-----------------]
"아악!"
엄청난 굉음으로 비명이 입 밖으로 나왔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눈앞이 잠시 보이지 않다가 다시 밝아졌다. 바닥에는 새하얀 모래가 깔려 있었고, 저 멀리에는 바다가 보였는데 고요했다. 시간은 알 수 없었는데, 동트기 전 새벽 그즈음으로 보였다. 그곳은 바람 한 점 없었고 따스했다. 마치 엄마 뱃속처럼...
"어이~ 뭐하슈?"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애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발아래에 하얀 바구니가 있었는데 안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미소 짓고 있었다.
"안녕? 형이라고 불러야 하나?"
"뭐, 뭐야? 왜 이렇게 말을 잘해?"
애초에 믿기지 않을 일들 투성이지만, 고작 태어난 지 5일 된 나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하하핫! 진짜네? 진짜 어른이 된 나를 만나는구나?"
"뭐야? 넌 알고 있었어?"
"그럼! 알고 있었지~"
"어떻게?"
"그건 비밀이야!"
이제 막 태어난 나는 말도 잘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개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어딘가 귀엽기도 했다.
"그냥 형이라고 부를게? 형! 나 궁금한 게 참 많아."
"... 그래?"
"응. 근데 할아버지가 질문 3개만 할 수 있대"
"... 어... 뭔데?"
질문 3개라는 말을 듣고 오늘 이 자리는 다 커버린 내가 아닌,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나를 위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신생아인 나는 눈동자를 위로 들더니 '음'이라고 소리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이내
"첫 번째! 우리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누구랑 결혼해?"
질문 2개를 하나로 하다니... 이 조그마한 게 머리를 굴렸다는 게 신기했다.
"야. 그건 질문 2개잖아."
"에이. 유도리 없이 왜 그래? 알려줘~"
"..."
나는 이제 막 태어난 내 옆에 앉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 뭐... 우선 부모님들은 둘 다 좋으신 분들이야. 아빠는 정말 성실하고 책임감이 많으셔 오랜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지, 어머니도 한 없이 우릴 이해하고 사랑했어"
"오. 그래? 좋으신 분들인데?"
"맞아. 좋은 분들이야. 어렸을 땐 몰랐는데, 결국 넌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하나하나 닮아갈 거야."
"오! 최고인데?"
"근데, 엄마는 화나면 무서워... 그러니 조심해."
"..."
아빠와 엄마 사이에 태어난 걸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신생아인 나는 방긋 웃으며 꽤나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
"어! 나는 누구랑 결혼해?"
"음. 너는 한 34살 즈음 결혼할 거야. 우리에게 과분할 정도로 예쁘고 좋은 사람하고 결혼했어."
"헐. 형 능력 있다! 어때? 결혼하니깐 좋아?"
결혼하니 좋냐는 질문에 어느 누구는 흠칫할 수 있겠으나 나는 누구보다도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좋아. 쉴 새 없는 마음이 언제나 돌아갈 집이 있다고 해야 하나? 서로의 인생을 언제나 응원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고 함께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야."
"오..."
"가끔 의견이 맞지 않더라도 가리키려 들지 말고, 다투는 날이 있더라도 항상 먼저 사과해. 알았지? 엄마와 마찬가지로 화나면 무서워..."
"... 응"
바닥에 있던 모래를 손으로 한 움큼 쥐었다. 거친 느낌 없이 부드러웠고 손바닥을 펴서 보니 반짝이는 수많은 모래알이 보였고, 입으로 불어보니 별처럼 흩어져 날아갔다.
"그럼! 다음 질문. 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
뭐 하며 사냐는 질문에 순간 멈칫했다. 어디까지 알려줘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10년 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현재는 글 쓰겠다며 까불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할 수도 없어 솔직히 이야기했다.
"음... 사람들을 상담하며 돕는 일을 오래 했어. 10년 정도? 그러다가 올해 그만뒀어."
"10년!?"
10년이란 말에 신생아인 나는 열 손가락을 펴더니 하나씩 접어갔다.
"아니, 그렇게 오래 하던 일을 그만뒀다고? 잘린 거야?"
"아니야. 내가 그만뒀어... 하고 싶은 일이 있었거든..."
"오? 무슨 일?"
"작가, 글 쓰는 일"
작가라는 직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지 신생아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잘되고 있어?"
"아니... 글 쓰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라.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고... 한, 30년은 늦은 거 같아."
"풉"
새로운 꿈을 갖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는 내 말에, 신생아인 나는 그 몸집만큼이나 작게 웃었다. 일을 그만둔 지 6개월, 나름대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건 간절함과 열망이 조금씩 식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일 그만둔 거 후회해?"
"음... 가끔은? 하지만."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어도 후회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후회하면서 살아가"
"음... 어쩔 수 없는 일?"
"응. 맞아. 언제나 후회는 우리와 함께해. 삶에서 뗄 수 없는 일부분이야. 소중한 친구라고도 할 수 있겠네."
나와 신생아인 나는 잠시동안 말없이 눈앞에 있는 바다를 바라봤다. 그러다 신생아인 내가 말했다.
"그럼. 잘 살고 있는 거네?"
"그러게? 아무튼 후회를 줄이려고 아등바등 살아가지 마. 누군가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회라면, 네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깐."
바다 멀리에서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하늘은 지금껏 본 적 없는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따스한 바람에 마음도 어느 때보다 편했다.
"마지막 질문. 그래서 지금까지 내 삶은 행복했어?"
"행복?"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내가, 37년을 살아온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우선 지금까지도 행복을 정확히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물음에 아무 말 없이 꽤 오랜 시간 고개를 들어 동이 트는 먼 하늘을 바라봤다.
"행복...이라..."
이제 막 태어난 내가 묻는 질문에 정답은 없겠지만, 이 아이가 기나긴 인생을 여행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랐고, 나보다 조금은 더 빨리 행복의 의미를 찾길 바랐다.
"음. 우선 행복의 뜻을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어."
"엥? 공부 안 했어?"
"그게 아니라..."
공부 안 했냐는 물음에 '응 너는 공부랑 인연이 없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네가 묻는 행복이 즐거움이라면 항상 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아. 하지만"
"하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생각, 감정, 느낌이 내 인생을 지나쳐가, 즐거움 보다 슬프고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신기한 게 뭔지 알아?"
"뭔데?"
"아무리 구린 하루를 보냈더라도, 그냥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거야."
'왜?"
"글쌔, 그 이유는 계속 알아가야겠지만, 그냥 무슨 일이 있더라도, 행복하다고 믿고 사는 게 진정한 행복인지 모르겠다. 어렵지?"
"뭐, 아니야. 대충은 이해했어."
"정말 많은 일이 널 찾아갈 거야. 어렵고 힘들더라도 모두 널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러다 보면 행복할 거야."
마지막 질문에 답변을 끝내자, 세상에 태어난 지 5일 된 나와, 지금의 나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눈을 감으며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인생을 들려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는 리셋하기로 결정할게."
"리셋?"
"응. 리셋."
컴퓨터도 아니고 리셋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 눈을 뜨는 순간, 이렇게 미래를 여행하고 돌아가"
"여행?"
"응. 그리고 그 기억을 갖고 살지, 아니면 잊고 살지 결정하지."
"그래? 근데 내가 말한 걸 다 잊고 살겠다고?"
응.
미래를 모르고 살아가는 게,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