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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돌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아

by 모모루

한국에 온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시차 때문에 낮에는 비몽사몽 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정신이 말짱해지는 것이었다. 실상 밤잠이나 다름없는 깊은 낮잠에서 깨어보니 바깥은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모두 외출했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다.

텅 비었다,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집도, 내 마음도 텅 비었구나.

마음이 텅 빈 느낌은, 어떤 비스무리한 결의 감정들이 뒤섞인 것이다.

쓸쓸하고 막막하고 무력하고 영영 잊혀지는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지금 한국에 있다.

나와 가까운,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죄다 살고 있는 곳.

같은 밤에 잠들고 같은 낮에 깨어 있을 수 있으니 그곳의 시간이 몇 시인지 살필 필요 없이 가볍게 전화를 걸 수 있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 집을 나섰다. 근처 지하철 역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둑한 거리 위로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도로는 정체된 차들이 줄을 잇고 있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번지는 붉은 미등의 행렬.

늦은 퇴근길을 서두르는 무채색의 우산들.

익숙한 장면이지만 익숙하지 않다. 무슨 말이냐면,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장면들이 전부 새삼스럽게 보인다는 뜻이다. 이 현상은 타국살이 오 년 만에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는 너무 오랜만의 고국 방문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십일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년도에도 한국에는 매년 들어오는데 변함이 없다.





어느 오피스텔 건물 일층의 작은 호프집에 우리는 마주 앉았다.

오렌지색 조명.

끈적끈적한 나무 테이블의 촉감.

검은 간장 위 하얀 마요네즈와 송송 썰린 초록색 고추.

작은 종지 속 대비가 선명하던 색깔들.

이 허름하고 촌스러운 장면은 반가운 것을 넘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의 나는 편안하다.





친구를 따라 생맥주 한잔을 시킨다.

술을 마시지 않은 지 무척 오래되었지만, 이때만큼은 한잔 마시지 않고서야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정말이지 기분이 좋다는 신호다.

남자친구와 다투어서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친구 앞에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친구가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눈치 없이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고 맥주잔을 거푸 입에 갖다 대었다. 친구의 연애사를 대수롭지 않게, 우습게 보아서가 아니고, 나는 그냥 그 순간이 행복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허름한 동네 호프집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시시한 사랑싸움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꿈결처럼 느껴질 만큼 비현실적이고 기뻤다.





우리는 호프집에서 나와 팔짱을 끼고 젖은 거리를 총총 걸었다.

문 닫는 시간 십 분을 남겨놓고 들른 다이소에서, 나는 오천 원짜리 탁상시계를, 대학교 출강을 나가는 친구는 볼펜 한 자루를 샀다.

친구는 어차피 2주 뒤에 캐나다로 돌아갈 건데 시계는 왜 사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머무는 방에 시계가 없어서 영 불편하다고 답했다. 그 볼펜은 왠 거냐고 나도 물었다. 친구는 실기시험 채점할 때 쓸 볼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일상의 행위를 할 때면 마음이 이상해져.

탁상시계를 사는 것도, 너와 호프집에 앉아 맥주 한잔을 하는 것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쩐지 서글프면서, 그러면서 재밌고 특별해— 이런 말을 친구에게 한 것도 같다.

지하 깊숙이 뚫려있는 3호선 전철역 안에서 우리는 덤덤히 작별을 했다.

일 년에 한 번, 태평양을 건너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우리는,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또 언제라도 만날 수 있을 것처럼 가볍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과거에 지긋지긋하다 느꼈던 고국에서의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돌아갈 준비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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