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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없는 것 투성인데도 살아진다.

by 모모루

상추를 씻으려는데 마땅한 그릇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냄비에 물을 받아 상추를 씻는다. 중간 크기의 낡은 편수냄비는 싱크대 하부장 구석에서 발견한 것으로 아마도 전 세입자가 쓰던 것 일테다. 냄비에 상추를 씻는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다 양푼이든 바가지든 동네 다이소에만 가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아니면 클릭 한 번으로 다음날 집으로 배송받으면 그만이다. 변변한 그릇 하나 없는 상황이 영 거슬리는 건, 다만 내 기분의 문제일 뿐이다.




부엌에는 냄비 하나와, 역시나 전 세입자가 남겨두고 간 머그잔 하나, 밥공기 두 개, 손바닥만 한 접시 한 장이 있었다. 나는 남이 버리고 간 물건을 쓰는 걸 께름칙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식기 몇 개라도 버리고 가 준 것에 은근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보통의 나라면 없는 살림살이를 채우느라 부산을 떨었을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쌈채소를 자주 씻어먹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일상이 안정되면, 그때 사도 늦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불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행동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나는 편리랄지 효용이랄지 그런 요소들을 거의 신념처럼 추구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십일 년의 타국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심을 한 이후부터 한국에 돌아온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내 그랬다. 새로운 시작, 변화, 낯섦, 불안정 같은 기류가 한꺼번에 몰아닥쳤고, 그로 인해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물감이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다. 어디에도 발을 딛지 못한 채 허공을 부유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억울하게도 이 혼돈의 쓰나미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어서, 표면적인 내 상황은 여유롭고 차분해 보였다. 따라서 아무도 이런 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었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러니까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나는 텅 빈 방을 물건으로 채우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작은 어수선함조차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옷장이든, 서랍장이든, 뭣이 됐든 내 마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모든 게 동작 그만의 상태로 멈춰 있기를 바랐다.

정작 어지러운 건 방이 아닌 내 마음인데, 모든 책임을 공간에 떠 넘기고 있는 셈이다.




그러는 와중에 깨달은 흥미로운 사실은, 온통 없는 것 투성인데도 그럭저럭 살아진다는 점이다.

냄비 하나로도 꽤 많은 일이 가능했다. 본연의 기능대로 라면도 끓이고, 오늘처럼 채소과일을 씻는 바가지로도 쓰고, 주전자 대신 찻물을 끓였다.

국자를 대신해 머그잔으로 국물을 뜨기도 했고, 젓가락이 없어서 배달음식에 딸려온 나무젓가락을 씻어서 말렸다가 또 썼다.

늙은 개를 비행기에 실어 올 때 사용한 애견용 켄넬은 탁자 겸 밥상이 되었는데, 냄비를 올려놓고 라면을 먹기에도, 소파에 앉았을 때 다리를 올려놓기에도 높이나 크기가 딱 알맞았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어야 되는 줄 알았다. 불편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유난을 떨었다. 각각의 물건에는 각각의 쓰임이 있고 딱 맞는 자리가 있으며 이건 이럴 때 쓰고 저건 저럴 때 쓰는 거라고, 용도와 기능과 목적과 역할을 일일이 따졌다.

아, 그동안 나는 참으로 복잡하게 살아온 것이다. 그딴 것에 매달려 버둥댈 필요가 없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되는 대로 살면 되는 것이었다.

다만 머리로 깨달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득도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아 지는 건 아니어서, 나는 여전히 상추를 씻을 만한 양푼 하나 없는 상황에 잠시 분개했다가, 냄비에 물을 받아 상추를 씻고는 '뭐 아무렴 상관없지' 누그러졌다가, 이랬다 저랬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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