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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Sep 19. 2022

우리는 그저 상황에 내던져질 뿐이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인터뷰는 이미 한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건너편 면접관 앞에 놓인 질문지를 슬쩍 쳐다보았다. 마지막 페이지의 여백은 거의 채워져 있었고 남은 질문은 한두 개 정도였다. 꼿꼿이 세우고 있던 어깨와 등에 힘을 빼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었다. 신경은 여전히 최대치로 곤두서 있었지만 그 상태를 유지할 체력적 한계가 온 탓이었고 이쯤 되자 될 대로 되라는 체념 비슷한 상태가 된 것이다. 두 명의 면접관 중 한 명이 물었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군요.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개선하거나 발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당신의 약점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자신의 약점을 말해보라는 질문은 받을 때마다 곤욕스럽다. 솔직히 말해 보육 교사 업무를 하는 데 있어 약점이라 할만한 것은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눈치가 빨랐고 출근 시간에 늦거나 기한 내에 마쳐야 하는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는 법도 없었다. 뭔가는 말해야 했으므로 스스로는 약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절대 동의하거나 지적할 수 없는 무기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영어는 나의 세컨드 랭귀지(second language)입니다. 그동안 일하면서 아이와 학부모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 교사들과 의사소통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어요. 다만 개인적인 욕심으로 영어 실력을 더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어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예상했던 대로 면접관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당신의 영어 실력은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 정도면 아주 완벽합니다."

물론 그 말이 절대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영어는 확실히 문제 투성이었다. 다만 이민자의 나라인 이곳에서는, 면접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영어가 능숙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발언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성소수자나 인종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하는 것만큼이나 금기시되어 있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답변을 열심히 받아 적던 두 명의 채용 담당자는 마침내 펜을 내려놓았다. 세 페이지에 이르는 그 종이에는 도대체 몇 개의 질문이 적혀 있던 것일까? 직전까지 일일이 답변을 했지만 도통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채용이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다른 지원자의 인터뷰를 모두 끝낸 후 최종적인 논의가 있을 예정이고 채용 당사자에게는 개별적으로 연락이 갈 것, 이라는 게 이어진 설명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게 그들은 학교를 둘러보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이곳은 시에 소속되어 있는 공립 프리스쿨(pre-school)로 일반 아동이 아닌 스페셜 니즈(special needs), 즉 특수아동을 위한 교육시설이었다.

때는 8월이었고 여름방학 중인 학교는 텅 비어있었다. 잘 정돈된 적당한 크기의 교실 외에 특수활동을 위한 방이 마련되어 있었고 바깥으로는 넓고 쾌적한 놀이터가 딸려있었다. 가구의 배치나 공간과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선이 합리적으로 잘 짜여 있었다. 두 명의 정교사와 두 명의 보조 교사, 그리고 세명의 각기 다른 분야의, 여기 말로 테라피스트(therapist)라 부르는 전문 치료사들이 한 팀이 되어 3세에서 5세 사이의 아이들 총 스무 명을 맡는 구조였다. 나는 두 명의 정교사 중 한 명을 충원하는 자리에 지원한 것이었다. 특수아동을 가르치는 일은 만만치 않겠지만 시설과 교육 시스템을 봤을 때 속으로 감탄이 나왔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관 중 하나였던 총괄 매니저는 학교를 구석구석 세심하게 보여주고 업무에 관한 추가적인 설명을 곁들였다. 나는 이것을 채용과 관련하여 좋은 신호로 봐도 되는 것인지 약간의 기대가 들기도 했지만 어쩌면 모든 지원자에게 의례적으로 제공하는 절차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와 주차된 차 안 의자 위에 앉았을 때 극심한 신체적 피로감이 밀려온 것은 물론이고 영혼까지도 너덜너덜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여러 번의 면접 경험이 있었지만 이토록 체계적이고 긴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해냈어." 차에 시동을 걸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어쨌거나 나는 대부분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알아듣지 못한 단어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으니 다시 말해 달라는 요구도 당당히 했다. 완벽하지 않은 영어였지만 그동안 일하면서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솔직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답변을 했다.

"그거면 됐어. 좋은 경험이었다."

채용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자신이 있지도 않았다. 특수 아동 교사 자격증은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그런 아이들을 위해 일해 경험은 전무했다. 그동안은 일반 어린이집에서 쭉 일해왔을 뿐이다. 비록 동경의 눈으로 학교를 둘러보기는 했지만 짧은 영어 실력과 빈약한 경험치를 무기 삼아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또 채용이 된다면, 아마도 나는 어떻게든 해 나 갈터였다. 그 믿음은 나에 대한 어떤 확신이나 자신감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어떤 능력이나 자격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갖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낯선 땅에서 마주한 '처음'의 날들이 떠올랐다.

나이 서른 넘어 들어간 학교에서의 첫 과제 발표날. 형편없는 영어 탓에 벌벌 떨었다. 

난생처음 실습을 나가 교과서나 상상이 아닌 실제 아이들을 마주하던 날. 그토록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기했었다. 아이들 앞에서 처음 수업을 했을 땐, 너무 긴장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처음 파트타임 잡 오퍼가 들어왔던 날, 처음으로 정규 교사직 계약서를 쓰던 날, 처음으로 담임교사로서 반을 맡았던 날, 처음 학부모 상담을 하던 날. 셀 수 없이 많은 '처음'의 순간들.

그때마다 뒤따라왔던 것은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었다. 확언컨대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저 상황 속에 계속 내던져질 뿐이었다. 헤엄치는 법이라고는 고작 책에서 읽었을 뿐이고 실전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헤엄쳐 보지 못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속으로 떠밀려 들어갈 뿐이었고,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기 뿐이었다. 되돌아보면 물에 뜰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민하거나 어떤 영법과 호흡법을 선택해야 하는지 일일이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팔다리를 휘젓거나 주변의 떠다니는 무언가를 붙잡거나 그도 아니면 살려달라고 외치거나,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만을 취할 뿐이다. 파도에 휘말린 죽을힘을 다해 허우적 대다 보면 마침내 어딘가에 다다르고는 했다. 더 이상 가라앉지 않고 수면 위를 유영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질문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더듬더듬 엉터리 영어로 답하며 자괴감을 느끼던 과거의 나는, 특수아동을 위한 캐나다 공립 프리스쿨에 지원해서 인터뷰를 볼 만큼 배짱이 두둑해진 지금의 나를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피아노 전공으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 중이던 내 친구는 어느 날 주임 교수로부터 학부의 음악사 강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친구는 당시에 거의 매일 내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다. 어떻게 피아노 연주 전공자가 음악사 강의를 할 수 있겠냐며 자신은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다고 근심이 대단했다. 그렇다고 지도 교수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인 친구에게 그 제안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약간의 우스개를 섞어 이렇게 말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우리는 그저 상황에 던져질 뿐이고 그때그때 헤쳐나갈 뿐이라고.

"처음부터 어떤 자격을 완벽히 갖추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하다 보면 그런 사람이 되는 거지."

무심결에 그렇게 말하고 나니 친구가 앞두고 있는 여정이 그동안 내가 거쳐온 과정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하고만 싶은 순간을 여러 번 거치고 나니, 전보다는 해낼 수 있을까를 덜 고민하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덜 저항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감당해 내리라는 믿음을 어렴풋하게나마 가지게 되었다.

친구의 음악사 강의는 어느새 3년째 접어들고 있다. 그녀는 이제 시대별 음악 사조와 당대 음악가의 연혁을 줄줄이 꿰게 되었다. 친구와는 요즘도 전화 통화를 한다. 대화의 대부분은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각자의 상황에 대한 신세한탄이다. 더 이상 노력이란 걸 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는 푸념 어린 투정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 때란 처음부터 없다는 사실을. 다만 용감하게 몸을 던질지 아니면 뒤로 물러나 그대로 멈출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음을. 더 나은 선택이 어느 쪽 인지도 알고 있다. 말로는 투덜댈지언정 언제나 그랬듯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위로 몸을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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