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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11. 2023

하얀패모 이야기 41-공부

공부

<공부>

우리도 공부를 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학생치고 토론, 봉사 활동, 기독 집회와 성경 공부 그리고 물론 각종 건수를 빙자한 수다 등에 다수의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인생의 고민이 철저했던 만큼 목표도 분명했고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생활을 너무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나는 여고에 그리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렇게 동경했던 여자들만의 생활은 속속들이 내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남학생들보다 더 거칠고 더 더럽고 더 노골적이고……우울했다. 내 유일한 탈출구는 녀석을 만나 지적 감수성에 자극을 받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대학을 노래했다. 

"대학에 가라. 거기 가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지금은 참고 공부만 해라!" 

이런 반복된 요구는 그것에 무작정 따르면서도 많은 질문을 하게 했다. 한편 부모님의 희생적인 삶은 더 이상 공부의 이유와 목적이 되지 못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고 머리가 아주 복잡해졌다. 타고난 책임감 때문에 언제나 포기를 하거나 극단적 반항을 하지 못했기에 열심히는 했다. 그러나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감 완수였다. 녀석도 마찬 가지로 공부에 대해 별의별 갈등을 했다. 왜 일생에 한 번 밖에 없는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을 학교에서 열다섯 시간 이상씩 앉아서 보내야 하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말해주기 않았다. 열아홉과 스물은 왜 그렇게 다를까? 그래도 우리는 소위 말하는 "범생"의 자리를 지켰다. 특히 녀석은 꾸준히 상위권을 지켰고 좋은 참고서가 있으면 내 것도 사 와서 함께 공부했다. 동네 도서관들과 올림픽 공원 등은 우리가 늘 만나 공부와 수다를 겸하여 즐기던 곳이다. 도서관의 매점 음식이 부실한 탓에 3년 동안 김치 사발면과 참 크래커로 우리의 끼니를 해결했지만 그래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기서 모여 공부하고 쉬었다. 체력이 약한 나는 빠르게 지쳐 갔다. 그러면 또 하루의 목표량을 다 하지 못해 실망하고 우울한 채 집에 돌아가야 했다. 그런 나를 녀석은 항상 기발한 방법으로 위로했다. 

"야~아직 오늘이란 시간이 두 시간이나 더 남았어. 지금 야! 새날 이다 하면 두 시간이나 더 공부하는 거야! 나는 아무 때든 늦었다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새 힘이 나는 법이야. 너도 해봐" 

또는 시험 결과에 속상해하면 

"야, 우리가 육십이 돼서 오늘 일을 생각한다고 한 번 상상해 봐. 수학 몇 점 받았다고 죽고 싶다고 한 게 얼마나 우습겠냐, 안 그래 OO 할멈?" 

녀석의 이런 소리는 묘하게 즉각적 위로 효과를 발휘했다. 녀석은 공부를 무작정 하지 않았고 각 과목의 궁극적 목표만을 생각하고 거기에 도달하면 만족해했다. 즉 "영어는 영어만 잘하면 된다"였다. 이상한 말로 들리겠지만 이건 중요한 포인트다. 즉 공부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는 거다. 영어의 경우 시험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영어라는 언어를 아는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성적에 여유가 있던 녀석은 늘 내 공부를 체크했다. 같은 대학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험 스케줄과 공부 스케줄을 함께 만들고 중요한 정보 역시 교환하고 같은 반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 요령들을 배워와 가르쳐 주기도 했다. 대입 고사 때 한 학교 같은 과에 함께 지원해서 결국 나란히 앉아 시험을 보고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입학 전부터 커플로 얼굴 도장을 찍고 다녔다. 나의 낙방으로 결국 녀석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우린 남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공부했고 남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얻는 고교 생활을 보냈다. 


[고3]

팔자에도 없는 시를 써보고 싶다

그것도 내일모레 모의고사라고

펜대를 열나게 돌리는 사람들 옆에서


나는 시를 모른다

시도 나를 모른다

허나 우리는 서로 알고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는 나를 모른 척한다

그러니 나는 맨날 그 뒤만 쫓아다닐 뿐이다

낙동강 유역에서 나는 시를 쓴다

대구엔 사과, 청도엔 감이 많단다


어제부터 나는 이 낙동강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가 나를 막는다


속이 답답하지, 읊어 봐, 읊어 봐 너의 묵은 속을


재주가 있어야 읊어보지

설령 재주가 있어도 

할 말 많은 내 속을 시로 쓰면 원고지 한 트럭은 나오것다


이 시간에도 때 모르고 문학이란 것에 빠져 버린 

어리석은 고3들이 나랑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1990.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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