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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살자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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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순호 Aug 08. 2023

Episode 30

서울

여행기간 동안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같이 할 수 있었던 모든 날들과 일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제는 만난 사람들이라는 말보다 '친구'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그들이다. 언제부턴가 시간이 조금씩 지남에 따라, 그날의 여행에 대한 기억들이 조금씩 변형되고 잊혀져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기억들이 잊혀져가는게 느껴진다고 알게 된 순간, 여행에 대한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오래도록 이 기억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행의 첫날인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한 날부터 짧게나마 글을 적기 시작했었다. 여행기간 동안 조금씩 적어두었던 기록들과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흩어져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가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과정은 그 당시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그때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때와 똑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열 걸음 정도 떨어져서 그때의 상황들을 장면 형식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행을 다녀와 기억들을 글로 기록하고 있은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동안 글도 쓰면서, 그곳에서 만났던 친구들의 얼굴들을 그려 친구들의 집으로 편지와 함께 하나둘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글과 그림들을 기록하던 중, 우연찮게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었다. '얼굴들'이라는 전시 제목으로 갤러리에서 전시하게 되었다. 전시 기간 중 유정씨와 연락이 닿아 전시장에서 만날 수도 있게 되었다. 을지로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를 했었는데, 마침 전시 기간 중에 유정씨가 한국에 오셨다는 연락을 받게 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락드렸는데, 흔쾌히 오시겠다고 하셔서 만난 그날 함께 꽤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정 씨를 만나고 나서 보니, 다른 친구들의 소식도 궁금해져 난 그동안 만났던 친구들에게 전시 소식도 알릴 겸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고, 서로의 소식들을 들을 수 있었다.

 파리에서 날 도와주었던 테스는 여전히 그곳에서 그녀의 반려견인 구찌와 함께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파리에 다시 올 때엔 꼭 자기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미리 연락하라며 얘기해 주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파리를 다시 갔을 때엔, 내가 맛있는 저녁을 사줘야겠다. 조나단과 클라리스는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리옹 인근 작은 마을에서 집을 구해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조나단은 마을 포도밭에서 농장일을 하고 있으며, 클라리스는 조나단과 함께 때때로 일을 하면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옹에서 전시를 했다고 했는데, 클라리스의 작업은 상당히 오묘한 색감을 지닌 일상 속 인물화였다. 그녀의 작업 속 인물들의 모습은 동적이지만, 무척이나 여유가 느껴지는 것이 색감과 함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보내준 사진을 보니, 역시나 자유롭게 삶을 살며 함께하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고, 역시 그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꼭 함께 전시하자는 약속과 함께 조만간 다시 보자는 약속을 했다. 베를린에 살고 있는 리사는 여전히 쾌활했다. 문자에서도 그녀의 쾌활함은 숨길수가 없어 보였다. 리사는 최근에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베를린에서 그와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보였다. 충형은 한 달 전까지 여행을 하며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최근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환경과 관련된 단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해당 프로젝트에서 마케팅 쪽 업무를 보며 지내고 있었고, 갤러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던 유정은 여전히 라스베거스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으며, 최근에야 휴가차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그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가족, 친지들을 만나며 약 2주간의 한국에서의 일정을 알차게 보내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사는 펩은 평소에 그의 SNS를 통해 그의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동안 다른 루트로 순례길을 한번 더 다녀오고, 바르셀로나에서 그의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어 보였다. 가장 놀라운 소식을 들려준 건 가장 오랫동안 함께였던 이네스였다. 그녀는 까미노를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를 만났고, 그와의 사이에서 새 생명이 생겼다고 들려주었다. 놀라기도 했지만, 너무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내 일정이 허락한다면 너의 결혼식에 꼭 가서 축하해 주겠다고 전했다. 폴란드에 사는 또 다른 내 오랜 동료였던 미하우는 까미노의 기억이 너무 그리워서 최근에 다시 한번 가기 위해 준비 중이라 했다. 이번에는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생장피데포르에서 부터 걸을 예정이라며, (미하우는 나와 만났던 첫 까미노길에서는 프랑스길의 중간 지점인 부르고스에서부터 걸었다) 나한테 같이 걷자며 제안했지만, 지금 당장 이곳에서의 현실을 뒤로 미루고 떠날 용기가 생기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네가 이번에 다녀오고 내년에 다시 갈 마음이 생긴다면 그때는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번 까미노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며 응원해 주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유쾌한 팜플로나 아저씨인 미겔은 팜플로나에서 가족과 함께 평온한 삶을 지내고 있었다. 미겔과 연락을 할 때에는, 팜플로나에 있을 때 걸었던 그곳의 길거리들이 떠오르며 더더욱 그리운 마음이 커졌다. 박하는 지금 유럽을 떠나 이집트에서 여행 중이었는데, 한국으로 언제 돌아갈지 아직 정해진 게 없지만, 돌아가서 보자는 말과 함께 안부를 건넸다. 세계여행을 진행 중인 그가 다시 한번 부럽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무쪼록 그가 여행을 마칠 때까지 별 탈 없이 무사히 여행을 즐기기를 바랬다. 마지막으로 생장에서 만나, 숙소에서 내가 떨어뜨린 책을 돌려주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인상 좋은 이탈리아 아줌마인 크리스티나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 몇 개월 동안은 연락이 잘 되었는데, 그 후로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나이가 꽤나 있어서 걱정이 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연락이 갑작스레 안 되다 보니 많이 걱정됐지만, 여기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상황이 답답했다. 그저 단순하게 번호가 변경해서 메시지를 못 받는 상황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앞서 언급한 친구들 이외에도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산티아고에 있는 집까지 초대해서 맛있는 찜닭을 대접해 준 재연 씨. 언제든지 자기 호텔에 와서 작업하라고 하던 이탈리아 삼 형제 마우로와 로렌초, 마치니.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살던 마드리에 사는 후안, 대구에서 선생님으로 2년 일했던, 야구를 좋아하는 삼성 라이온즈 팬이었던 헨리. 나와 동갑이었던 덴마크에서 의사로 일하는 카렌과 항상 날 신경 써주었던 스페인 할아버지 프란체스카. 스위스 털 복숭이인 미셸, 말라가 청년 알레한드로, 웃음이 예뻤던 한국인 동생 하연, 광주에 사는 유쾌한 엄마와 아들. 다 너무 보고 싶었고 고마운 마음이 큰 사람들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함께 했던 기억이 있어, 아무런 어색함 없이 즐겁게 기분 좋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이번 여행을 다녀오며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새삼 새롭게 알려주고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준 그들에게 항상 행복이 그들과 함께 하기를 바래본다.

나는 다시 한번 크리스티나에게 편지를 써보려 한다. 크리스티나로부터 이번엔 꼭 답장이 오길 바래본다. 기간이 그렇게 긴 여행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긴 여운이 함께 했던 이번 여행의 쉼표 같은 마침표를 찍어본다.







'얼굴들'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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