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에는 9시 뉴스도 재밌고, 병에 걸리면 공부도 재밌어진다. 학교를 떠나 힘든 병원생활을 하며 학문에 대한 갈망이 샘솟았고, 공부가 제일 쉽고 재밌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생으로부터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은 지 어느 새 일 년이 지났다. 퇴원 후 매주 병원에 가서 혈액 검사를 받았는데, 주기가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늘어났다. 먹던 약도 많이 줄었다. 물론 그 사이에 대상포진이라는 악재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넘겨왔다. 그러는 사이 백혈병 때문에 학교를 떠난 것도 어느 새 이 년이 되었다. 복학이 늦어진다면 나이가 많아져서 취업에 불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조금 우려하셨지만 2011년 1학기에 복학을 결정했다.
내가 없는 2년 동안 학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동아리방과 고시반에 가서 친구들과 선후배들한테 인사를 건넸다. 다들 복학을 환영해주었다. 캠퍼스에는 푸른 잔디가 올라오고 꽃잎이 날리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수업을 신청했다. 일주일에 15~18시간 정도의 수업이라 수업이 없을 때 동아리방이나 휴게실에서 푹 쉬었다. 아프기 전에는 전공수업도 대리출석하고 안 나갔고, 시험 전날에도 친구들과 술 마시며 놀아서 학점이 엉망이었다. 그렇게 재미없던 대학교 수업들이 아픈 후 들으니 너무 재미있었다. 자연스럽게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C+를 받았던 수업들은 A와 B라는 점수로 대체되었다.
예전과 또 달라진 점은 신청한 수업이었다. 아프기 전에는 이중전공을 신청해서 다른 언어를 배워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프고 나서 새로운 언어를 전공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학점이나 정신건강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언어학과 학생들은 해당 국가에서 살다 오기도 하고, 어학연수도 많이 갔다오기 때문에 그 학생들 사이에서 높은 학점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 이중전공을 하지 않고,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수업들을 들었다.
정치외교학과의 정치학개론, 한국정치사 같은 수업을 들으며 정치 체계와 우리나라의 정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심리학 수업도 정말 흥미로웠다. 프로이트와 융을 공부했고,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공부했다. 당시에 심리학 관련 책도 꽤 읽었는데, 이것은 나를 포함하여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라디오 듣는 것이 취미여서,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 관련 수업을 들으며 PD라는 직업에 대해 흥미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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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전공이 상경계열이어서 경제와 경영에 치우친 공부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배워보고 싶은 다른 수업들을 마음껏 들으니 지적 호기심이 충족되었고, 흥미가 있으니 학점도 자연스럽게 잘 나왔다. 마치 어렸을 때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꺄르르 좋아하던 세 살짜리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런 배움의 기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하고 싶은 것은 망설이지 말고 해보자’가 인생 모토이다. 코로나 터지기 전에는 국내나 해외여행을 다녔고, 삼십대 중반에 아이돌 댄스도 배웠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사소한 핑계로 미루지 않고, 하루를 소중히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주는 영화를 보았는데 제목은 바로 <어바웃 타임>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었다. 어떤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해 시간을 계속 되돌렸고, 결국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주인공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든 다시 시도할 수 있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이번이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여 매 순간에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소중하고 충실하게 살아야한다. 순간이 쌓여서 하루가 되고, 그것들이 쌓이면 한 달, 한 해가 되며, 그것이 쌓여서 인생이 된다. 아픈 뒤에 후회하면 늦다. 이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