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병원은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병원 식당가에 어떤 음식점이 맛있는지 어떤 메뉴가 별미인지도 안다. 이식을 받은 후 혈액상태를 검사하기 위해 병원에 주기적으로 외래진료를 보러 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매주 병원에 갔고, 상태가 나아지자 한 달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았다. 초기에는 어머니와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고 갔는데, 시간이 흐르고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갔다. 어떤 날은 눈이 왔고, 어떤 날은 비가 왔으며, 또 어떤 날은 맑게 갠 날이었다. 이식 초기에 들었던 재발에 대한 불안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라져갔고, 나중에는 의사선생님한테 인사드린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갔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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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선생님께서는 모니터에 비친 내 혈액검사 결과를 쓱 보시고는 ‘이제 병원에 안 와도 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어안이 벙벙하게 있자 선생님께서는 ‘그 동안 고생했다‘고 얘기하시고는 악수를 청하셨다. 선생님의 손을 잡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오자 간호사님이 웃으며 다음 진료 예약은 없다고 알려주셨다. 예전이었더라면 진료 스케줄을 잡아주셨을 것이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다시 한 번 드리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가족 카톡방에 오늘 마지막 외래진료를 보고 왔다고 올렸다.
병원에서 전철역까지 걸어가는데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로수에는 짙푸른 나뭇잎들이 풍성하게 매달려있었고, 지난 십 년의 시간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 A병원에 입원했을 때, B병원에서 처음으로 골수검사를 받았을 때, C병원에서 조혈모세포 유전자 맞는 사람이 공여를 거부했을 때, D병원에서 동생으로부터 이식을 받았을 때. 내가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힘들었던 병원생활 후에는 조심하면서도 열심히 살았다.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젊었다. 가벼운 운동과, 적은 체력을 요하는 활동부터 시작했다. 중간에 대상포진에 걸리고 숙주반응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말에는 친구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직장인이 되어 회사를 다닌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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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 나의 병원생활 졸업을 축하해주었다. 이십대의 젊은 아들은 어느새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어있었고, 우리 부모님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다. 두 분의 얼굴에 주름이 많이 늘었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주름 중 몇 개는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이직에 성공한 여동생은 회사생활이 힘들다고 투덜댔다.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건강하고 무탈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지만, 아프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다. 나는 백혈병에 걸려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낸 것이 절대 아니었다. 부모님의 헌신, 여동생의 조혈모세포 기증, 친척과 친구들의 응원, 성당 교우분들의 기도. 죽을 때까지 감사할 사람들이 많다. 그분들의 바람대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