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내 머릿속에 결말이 다 지어진 얇은 소설책을 들고 나왔다. 한번 읽은 책은 다시 표시해 둔 곳을 훑어보는 것 말고는 다시 정독하지 않는 편인데, 가져온 책 중에 소설책이라곤 이것 하나인 데다 지금 기분에 내키는 책도 이것 하나라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늘 그렇듯 책을 읽으며 어떤 표현을 대체하는 단어와 그 단어의 주된 쓰임새를 검색해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한국인임에도 한국말은 무수히 단어가 많고 내포된 의미와 표현이 다양해서 책 읽는 동안의 재미에 한몫한다. 나는 순간 이것이 내 하나의 취미라는 걸 직감하며 네이버에 단어를 검색할 때 슬며시 드는 궁금증에도 신선함을 느꼈다. 나도 취미가 있는 사람이다! 이것에 스스로 이 시간의 주인이 된 사람임을 자부하기도 하며.
우린 발리의 비치 클럽에 왔다. 아침 일찍 와서 저녁노을까지 누리고 갈 계획으로 구석 쪽 다소 한가로운 위치에 자리한 널찍한 소파에 앉았다. 마키아토 한잔을 주문했다. 마치 평소에 오지 않던 곳에 오면 흔히 먹지도 않았던 것도 먹어봐야 되지 않겠냐는 취지가 분명한 선택이었다. 땅딸한 에스프레소 잔에 조그맣게 담긴, 쌉쌀한 산미가 강한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귀 뒤로 퍼지는 카페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무렴 아직은 10시 반, 오늘이 제대로 시작되고 있는 시점일 뿐 어떤 걱정도 사치일 뿐이리.
책을 읽다 먼저 풀장에 몸을 담그러 들어간 남편의 뒤로 시선을 쫓았다. 깔끔하게 밀은 짧은 머리에 넓은 등판의 그는 밀고 들어오는 파도와 하나가 되어 눈에 담겼다. 나는 그가 풀장에 들어갈 때면 늘 그 뒤를 지켜보았다가 꼭 한 번 뒤를 돌 때에 맞춰 손을 흔들어준다. 그건 내가 당신과 함께 풀장에 들어가진 않지만 나는 여기서도 당신을 맘껏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나만의 표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잘 있나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는 남편에게 나 또한 할 수 있는 애정표현 중 하나인 것이다.
크고 높이 그려지는 파도와 그 속에 남편의 모습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저 둘의 공존을 위해 나는 자주 이곳에 와야 할 것만 같은 책임감이 느껴진다. 여행을 하며 남편의 행복한 순간을 온몸 다해 지켜주려 노력하는 나의 모습은, 단지 내 여행엔 그거면 충분하다는 뜻으로도 보인다. 실제로도 나는 인생을 계획하는 일에 있어 남편이 그리는 방향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집어넣는 식인 것을 보면 내 인생의 돛은 남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나는 그 사실을 되려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주로 읽는 소설책은 표현이 두리뭉실하거나 직접적이어도 여러 의미로 해석될만한 틈을 가진 문장이 많다. 그게 좋아서 주로 그런 책만 골라 읽기도 한다. 말했듯 나는 어려운 단어와 표현을 찾아보는 데에 하나의 취미를 둔 사람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한때 한국인들의 귀를 한창이나 간지럽혔던 그 책이다. 발리를 생각하며 고른 책이었는데, 크게 보면 익숙하고 편한 것과 새롭고 설레는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의 전개가 여행지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감정에 전혀 뜬금없지는 않아서 좋다. 이미 알던 문장을 훑어가며 처음엔 어렵던 감정 표현이 다소 수월하게 받아들여지는 대에 묘하게 재미를 느꼈다. 내가 소화해낼 수 있는 표현이나 감정들이 풍부해졌다는 사실이 주는 뿌듯함, 내가 나를 인정할 때 느껴지는 자존감에 비롯된 즐거움인 것이다.
좋은 날씨를 담은 파란 하늘이 여행 중임을 상기시켰다. 이건 살면서 자주 느낄 수 없는 기쁨. 햇볕이 너무 쨍하지 않고, 그렇지만 구름은 뭉게뭉게, 본인을 닮을 바다를 생각한 배려심 깊은 푸른 하늘의 색. 발리 여행을 하며, 순간에 소설보다 더 신비로운 현실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젊음’이라 부른다. 우리는 젊으면서도 젊음을 갈구하는, 눈 감았다 뜨면 벌써 지나가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을 애써 생각 않으려 힘껏 누린다.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자주 놀라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조금씩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길.
어느새 3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맞춰 조그맣던 먹구름 일부에서 엷은 소나기가 내린다. 비를 피하며 누워있는 우리에게 ‘Happy Honeymoon’이라 쓰인 작은 케이크를 가져다준 스탭의 센스에 감탄했다. 아, 애정이 넘치는 이 나라의 매력은 언제고 다시 찾아올 이유가 되겠지.
이런 자유롭고 건강한 기운으로 느낀 것들을 통해 쓰이는 글들을 사랑한다. 자신의 젊음을 담는 표상이 있는가. 당장 내일을 위해라도 오늘의 하루는 부디 남겨져야 한다. 희망보다 강한 건 추억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