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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Apr 15. 2024

책들의 시간 81. 술과 바닐라

# 술과 바닐라_ 정한아 소설_문학동네

  한 삼 주 만에 딸이 집에 왔다. 좋다. 뭐 먹고 싶냐고 물으니, 쌈 채소 가득에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이 먹고 싶단다. 전형적인 집밥. 요리하는 것도 싫어하고, 살림에 완전 젬병인 나도 딸이 온다 하니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좋아서. 

  그런데 젊을 때는 몰랐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리고는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데리고 가서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키워주셨다. 시부모님과 함께 산 세월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의 양육은 온전히 어머니의 삶이었고, 아이는 어머니를 엄마로 알고 잘 컸다. 서운하지 않았다. 아이가 나를 이모나 고모처럼 여긴다 해도, 아이를 키우지 않았으니 괜찮다, 그리 생각했다. 


  이 책은 여성의 시선에서, 다양한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얼마나 술술 잘 읽히는지, 손에 들고는 며칠 만에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생각이 많아지기는 했다. 인상 깊은 구절은 많았지만, 선뜻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내밀한 부분이라 내 생각을 글로 적기에는 쉽지 않겠다, 그리 여겨지긴 했다. 어쩌면 너무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고. 

  하지만, 늘 읽던 작가의 책이 아니어서 나에게는 낯선 작가의 참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고 읽은 기쁨을 맛보게 해 준 책이기도 했다. 이제 도서관에 가면 ‘정한아’ 작가님의 책을 나는 또 찾고 있겠구나, 그런 생각.      


1. 스며들다


  상념에 붙잡히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나는 할 일을 찾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해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어설펐지만 점점 요령이 생겼고, 능숙해졌다. 찹쌀가루로 풀을 쒀서 김치를 담그고,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밀어 만두를 빚었다. 서랍은 꼭 골판지 따위로 구획을 만들어 정리했다. 아들의 땀에 젖은 운동복은 구연산을 풀어놓은 물에 하루를 담갔다가 빨았다. 그 모든 것은 이모님에게 배운 것이었다. (68쪽)


  율이는 이모님을 기억하지 못했다. 생애의 가장 작고 약한 시절 자신을 안아주고 지켜준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한편 그 애는 만둣국을 제일 좋아하고, 숲을 제집처럼 쏘다니며, 오래된 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소년으로 자랐다.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면서 남편의 키를 앞질렀다. (69쪽)


  ‘술과 바닐라’에 실려 있는 단편은 7편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다 어느 정도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 대학생 시절의 일부를 함께 보냈던 친구의 죽음, 남편과 이혼 후 아이를 잘 키운다 생각했는데, 아빠와 살겠다는 아이를 지켜보는 여자의 마음, 유부남을 사랑했지만,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버린 여자의 이야기, 그중 가장 나의 마음을 붙들었던 단편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술과 바닐라’이다. 


  드라마 작가인 주인공은 아이가 태어난 후 도저히 아이를 돌볼 수 없어 일과 양육이라는 상황의 딜레마에 빠진다. 그때 아이를 돌보는 ‘이모님’을 고용하게 되고, 주인공의 삶은 일적인 측면에서 날개를 달아 날아오르게 된다. 나중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고 보니, 아이는 배변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타인과의 의사소통도 수월하지 않은 그런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주인공은 이모님을 해고하게 되고 까맣게 잊고 산다. 남편과의 불화와 아이의 진로로 인해 다시 떠나왔던 도시로 돌아왔을 때, 그 시절 자신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던 이모님을 주인공은 떠올린다.  


  책을 읽으면서, 마주하게 되는 어떤 순간의 선택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아이는 이모님의 존재를 완전히 잊었지만, 이모님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의 영향으로 만둣국을 좋아하고 오래된 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으며 주인공 역시 집안일을 해내며, 만두를 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 대학도 채 졸업하기 전이었으며, 대학원의 입학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결국 나는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울 수 없었다. 그때는 그래야 한다는 마음도 사실 없었다. 시어머니께서 태어난 지 두 달이 된 아이를 데리고 가서 키워주셨다. 물론 집이 근처였기에, 오며 가며 아이를 보긴 했지만, 우리 부부가 아이의 목욕을 시킨 것이 열 번이 되지 않았으며, 아이를 데리고 잔 게 생각이 잘 안 날 정도였다. 어머니의 손에서 아이는 정말 잘 자랐다. 스며들 듯 어머니의 삶의 모습과 가치관이 아이의 삶 속에 생기기 시작했으며, 피할 수 없는 DNA의 영향으로 남편과 나의 모습을 닮아갔다. 빵보다 밥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으며, 계란찜에 새우젓이 들어가야 맛있다는 걸 아는 아이가 되었고, 다양한 음식 맛보기를 즐기는 아이가 되었다. 공부도 곧잘 해서 상도 잘 받아왔고, 대학도 어려움 없이 진학했다. 아이가 그렇게 커 가는 동안에, 나는 책을 읽었고, 일을 했고, 주말에 아이와 잘 놀러 다녔다. 


  때때로 주변 사람들이 물어보곤 한다. 아이를 키우지 않았던 거 섭섭하지 않냐고, 아이가 엄마보다 할머니를 찾는 거 괜찮냐고, 아이는 부모가 키워야 하는데 아이에게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진 않냐고. 아직 잘 모르겠다. 여전히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기복이 있는 나보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우리 아이를 키워주신 것, 그리고 그런 할머니 밑에서 아이가 자란 것, 정말 감사한 일이라 여기고 있다.      


2. 불안한 사랑


나는 밝고 명랑한 남자들을 좋아했다. 할머니가 부르면 스스럼없이 집에 들어와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묻는 말에 시원하게 대답하며 몇 그릇이고 밥을 비우는 그런 남자들. 상대의 호의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동경했지만,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손톱 만한 결함에도 쉽게 마음이 식었다. 삼십 대 중반에 이르러 내가 얻은 결론은 나에게 관계를 지속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혼자가 편해졌고,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나는 보다 합리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다. 소득의 절반 이상을 저축하고 영어 회화를 공부하고 매일 헬스 트레이닝 센터에 다녔다. 하지만 종종 인적이 없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문은 지금껏 내가 만난 남자들과 달랐다. 내성적이고, 예민하고, 그늘이 짙었다. 그런 문이 내 손을 잡고서 무섭다고 말했을 때, 단단한 둑처럼 막아놓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와 함께 끝까지 가고 싶었다. 영원히 도망치고 싶었다. (225쪽)


   단편 ‘핼러윈’은 유부남을 사랑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안한 사랑의 시작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모의 이혼, 본디 자신의 일 말고는 중요한 것도, 궁금한 것도 없는 아버지, 자신과 참 비슷한 점이 많은 할머니, 결국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결핍 때문이었을까? 


  주인공의 감정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늘 쉽게 식었고, 내성적이고 예민하고 그늘이 짙은 유부남 직장동료에게 이끌렸다.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자주 잊게 만드는 '문'은 어느 날 주인공의 손을 잡았고, 무섭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에 주인공은 '문'에게 빠져들어 함께 도망치게 된다. 

  불안한 사랑의 결론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그 결말이다. 드라마에서 많이 봐 왔으며,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일상적 선의 기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결말. 다만 그 과정에 이르는 동안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할머니의 죽음과 유언, 그리고 할머니의 가게 정리. 그런 것들이 주인공이 오히려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미애의 물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헐리고, 가게가 팔리고 나면, 나도 이곳을 떠나야 했다. 어디로 갈지는 몰랐다. 때로는 홀로 떠돌다가 비참하게 죽는 것만이 문에게 복수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증오와 허영심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227쪽)


  스스로에 대한 증오와 허영심. 불안한 사랑의 결말. 

  책을 읽으면서 나는 대학교 시절, 처음 만났던 선배가 생각났다. 사랑이 아니었기에 선배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다만, 늘 우울했던 그 선배가 나는 눈에 밟혔고, 그 사람이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리 우울한 사람에게 끌렸는지, 마음이 움직였는지, 그의 사랑을 갈구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게 다행이구나, 그리 여기는 건 어떤 마음일까. 안도일까, 아니면 지금 행복하다는 반증일까.      


3. 정리     


  늦은 밤 꾸준히 요가 수련을 하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불면으로 고생했던 경험이 있다. 불면의 이유란 하고많아서 해소하는 데에도 정답은 없지만, 분명 도움이 되는 것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조금 웃는 것, 그리고 고양이 자세를 하는 것. 나는 매일 수련이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웃기는 이야기를 해준다. 썰렁한 농담이지만 수련자들이 소리 내서 웃어준다. 마지막에는 다 함께 고양이 자세를 한다. 엉덩이를 허공에 치켜들고 가슴을 땅에 대는 그 동작은 보기보다 쉽지 않은데, 수련생들이 모두 숙련자들이라 능숙하기만 하다. 나는 우렁찬 소리로 구령을 외치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내가 이전에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선의이다. (172쪽)


  여전히 소설을 좋아하는 건, 타인의 삶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구나, 그걸 발견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갖고 싶은 어떤 그 모습 때문에 나는 소설이 재미있고 좋다.


  바쁜 삼월이 지나면 좀 더 여유로운 사월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일상은 바쁘다. 그럼에도 아침에 걷고, 자기 전에 책을 읽고, 참 감사한 일상의 장면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요가를 가르치면서 사람들이 모두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전에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선의의 마음을 품는 것, 요즘 나의 일상이 그렇다. 정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 그들이 나의 동료임이 참 감사한 것, 일상의 평온함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 곁에 내가 함께 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이야기 나눠 보기]

1) 어린 시절 누군가의 양육이 내 삶에 영향을 주어 습관이든 행동에 스며든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불안한 사랑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면, 또는 그런 마음으로 힘들었던 적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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