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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 soleado Jul 30. 2022

스페인어, 너는 누구니

스물아홉에 시작한 낯선 언어

낫 놓고 ㄱ자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외국어와 담쌓은 내가 서른이 다 되어 스페인어를 알파벳부터 시작했다. 당시 내 옆에는 동글동글 꼬부라지고 뱀처럼 쭉쭉 뻗은 모양새가 도저히 글자일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 베트남어, 태국어, 아랍어, 몽골어를 배우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내가 배우고 있는 스페인어 알파벳은 매우 효율적인 문자였다. 특수 발음을 가진 몇 개만 외우면 대부분의 발음은 영어보다 더 규칙적이고 직관적으로 대응하므로 익히기가 수월했다. 몽골어를 배우며 연신 '흥/항/홍' 소리만 줄기차게 반복하던 친한 동생은 며칠 새 내가 스페인어 문장들을 줄줄 읽어 내는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보고타에 오기 전 하루에 약 4시간씩 1개월 정도 스페인어를 배웠는데 보고타 어학원 수업 첫째 날에 한국에서 한 달간 배워 온 모든 스페인어의 진도를 다 나갔다. 약간의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틀째부터는 새로운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친근한 스페인어 알파벳 중 전혀 생소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에녜[enye]'라고 발음하는 바로 이 문자였다.

Ñ(ñ)

지구 이상기온과 관련한 용어 중 엘니뇨(el niño), 라니냐(la niña)를 표기할 때 사용하는 'Ñ'이다.



어느 날 스페인어 선생님이 칠판에 쓰며 설명을 하는데 어제 쓴 '에녜'와 오늘 쓴 '에녜'의 생김이 달라 잠시 생각 했다.


- '저건 뭐지?'




사람마다 필체가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어떨 때는 정자체로 또 어떨 때는 휘갈기듯 그렇게 쓰기도 하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던 내 옆 자리 친구도 있었건만, 난 저런 게 신경 쓰이는 사람이므로..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자음일까 혼자 앓는 것보다 질문하고 나면 후련하니 그냥 질문을 습관화하는 학생이 되기로 했다. 적극적인 학생이었다고 기억해 준다면 고마운 일일 것이다.



한국어교육현장에서도, 특히 초급반 수업을 할 때는 글자를 매우 정확하고 일관되게 써 주어야 한다. 기초 단계에서는 정확성을 높여야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여는 초기 학습자의 학습 과정 중 발생하는 불필요한 혼돈을 최소화하고 잘못된 표기나 발음 등이 화석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에녜' 위에 씌워진 모자를 곡선으로 그린 들 직선으로 그린 들 그 의미나 소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것에 집착하던 순간들도 있었다. 지금은 당시의 선생님처럼 나도 찍ㅡ 긋고 말지마는..!!






멕시코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조식을 먹고 일어서며 커피 한 잔을 들고 산책을 하려는데 커피머신이 보이지 않아서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물었다.



- Dónde está tinto? (커피는 어디에 있나요?)

- Tinto?

- Sí, me puede dar dos tintos para llevar por favor? (네, 커피 두 잔만 테이크아웃할 수 있을까요?)



커피머신 못 찾은 나보다 더 윙스러웠던 표정의 직원은 다른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 보였고 그 다른 직원이 나에게 와서 정말 띤또를 원하는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 Quiere llevar vino tinto?



그가 덧붙인 한 마디를 듣고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내가 아침 8시와인 두 잔을 테이크아웃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을.



스페인어로 와인은 'vino'이다. 레드와인은 'vino tinto'이고, 화이트와인은 'vino blanco'다.

Tinto라는 단어는 '검붉은/자줏빛의'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인데 콜롬비아에서는 그 자체를 아메리카노 커피와 큰 차이가 없이 쓴다. "Tinto 한 잔 주세요"라고 하면 이곳에서는 누구나 커피를 생각하지만 멕시코에서의 'Tinto'는 와인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전에 들은 적이 있었지만 억이...



정구지가 부추라는 것을 스물세 살이 되어서야 알았으니 20여 개 국가에서 사용하는 스페인어의 지역차야 두 말하면 입 아플 일이다. 한 친구는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나중에 파라과이에 가서 일을 했는데, 마치 새로 배우는 것처럼 단어 사용의 차이가 크다고 했었다.






예전에 BBC에서 만든 교육 채널로 스페인어를 공부한 적이 있었다. 주인공인 미국인 Sam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배우며 벌어지는 내용으로 구성된 드라마였다. 한 언어 당 대략 10개 정도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똑같은 내용을 여러 언어 버전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주인공 Sam은 몇 개 국어를 구사하며 각 버전마다 매번 출연하고 주변 인물들만 원어민 배우들로 바뀌는 형태의 매우 독특한 설정이었다.(Sam 대단해!!!)



< Extra en español >




스페인어 버전만 반복적으로 틀어서 보다가 이따금 공부하기 싫어지면 프랑스어, 독일어 버전 등을 틀어보곤 했는데 까막귀가 따로 없었다.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가 다시 스페인어 버전으로 틀면, 스페인어 이제 겨우 낫 놓고 ㄱ자 아는 수준임에도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잘 들리는 신기한 느낌이 들곤 했다.



언어 단계가 초급으로 설정되어 있어 쉽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공부하고 있는 언어이니 들리는 게 있는데, 그 몇 마디가 귀에 들리고 안 들리고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모르는 건 그냥 영영 모르는 미지의 세계이고 아는 것은 귀를 거쳐 머리에 인식되는 나의 세상이었다.



학문이 아닌 생존을 위해 배우는 외국어는 확실히 빨리 늘었다. 못 알아듣고 말 못 하면 일상이 팍팍해지는 이 환경의 설정은 나를 아주 스페인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상 대화가 수월해진 이후로는 그 정도면 살만해서일까. 더 고급 수준으로 진보하기보다 정체 상태에 머물러 늘 고만고만한 말들만 하며 몇 년째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 정도 수준으로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컴플레인도 하고, 화도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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