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븐틴에 입덕했을 때는 전국민이 노잼 시기를 묵묵히 수행하던 코로나 시기였다. 노잼시기에는 콘서트도 온라인으로 열렸고, 나 역시 입덕 후 첫 팬미팅과 콘서트를 모두 온라인으로 봤다. 뭘 해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는 입덕 1년차로서는 일단 애들이 각잡고 몇시간 동안 무대를 해주니 벅차올라하며 보기는 했는데, 그거와는 별개로 '애들 실물'이 없는 팬미팅과 콘서트는 진짜로 느껴지지 않았다. 난 '진짜'를 언제 볼 수 있을까? 언론 기사를 가까이 하는 직종이었고, 마침 당시 회사가 문화 분야에 속해 있던 회사였기 때문에 나는 늘 모니터링을 핑계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언제쯤 오프라인 콘서트를 부분적으로라도 허용해줄지 살피곤 했다.
2022년 3월 말, 세븐틴 팬미팅 '캐럿랜드(우리는 줄여서 '캐랜'이라고 부른다)'가 열린다는 소식이 떴다.
그때부터는 모든 절차가 일사분란하게 돌아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내 자리'를 확보하는 일이다. 세븐틴 티켓팅에 처음 참전해보는 거라 어느 정도 수준일지 나에게 쌓인 체감 데이터가 전무했다. 티켓팅을 잘하는 덕후 친구와 회사 동료를 포섭해 나까지 3명의 티켓팅 용병 군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 빼고 저 둘만 티켓팅을 성공해서, 나는 첫 번째 팬미팅(첫콘)과 마지막 팬미팅(막콘)에 가게 된다. 오랜 기간 갓반인으로 살아오며 굳어진 나의 손을 믿지 못해, 만약 실패하더라도 그나마 덜 아쉬울 것 같은 둘째날 공연을 내가 맡은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게 있었다. 내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야 했다. 코로나에 걸리면 일주일 동안 격리하던 시기였다. 격리가 된다는 건, '내 자리'로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절.대.로. 코로나에 걸려서는 안 됐다. 나는 극도로 조심해야 할 콘서트 2주 전을 앞두고, 두세번의 상상 코로나를 겪었다. 이 상상 코로나 증상은 병원에서 음성 판정이 나온 이후 빠르게 사라졌다. 간헐적 재택근무를 하던 시기라 일주일에 두세번은 사무실에 꼭 나가야 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나는 마스크를 두 개를 끼고 얼굴 위로는 의료진이 착용하는 페이스쉴드를 사서 덮어쓰고 다녔다. 손에는 니트릴 장갑을 끼고 다녔다. 내가 생각해도 괴랄한 모습의 자가 방역이었으나, 나는 전문 의료진이 착용하는 우주복같은 방역복마저 살 기세였다(사실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루는 회사에서 사내 문화를 찍는 그룹사 예능을 촬영해야 해서 사무실에 나가는 것도 모자라 열명 남짓한 외부인까지 만나야 하는 일이 있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저 꼬라지를 하고 예능 촬영 팔로업을 하러 갔다. 여러모로 나를 굉장히 아픈 사람으로 보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한번보고 말 저들에게 어떤 미친년으로 보인다 한들, 코로나에 걸려서 팬미팅에 못가는 일이 생기는 것보단 그 편이 백번 낫다. 촬영이 다 끝난 후 기쁨에 가득찬 나머지 내가 활짝 웃으며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MC와 촬영진을 배웅할 때, MC가 나한테 "이렇게 밝게 웃으실 수 있는 분인지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무척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에게 죄송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더 급했다.
오프라인 공연은 허용됐지만 함성은 금지된 시기였다. 세븐틴은 팬들에게 함성 대신 소고를 치라고 했다. 소고는 세븐틴 멤버 도겸이 자체 예능 콘텐츠 '고잉 세븐틴'에서 소고의 리듬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세븐틴과 팬 모두에게 익숙한 악기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소고라니, 초등학교 졸업 이후 소고를 들어본 본 사람이 있긴 할까? 하지만 나는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다. 공식 굿즈로 나온 세븐틴 소고를 사서, 트위터를 통해 스티커로 된 멤버 이름 홀로그램 스티커를 사서 '소꾸'를 했다. 다소곳하게 침대에 앉아 정성스럽게 꾸민 소고를 들고 공연 전에 올라온 소고 응원법을 연습하는 나 자신의 모습, 제법 완성된 미친년같았다.
그리고 대망의 그날이 온다. 내가 세븐틴 실물을 처음 보러 가는 날. 2022년 3월 27일.
오후 반차를 쓰고 잠실로 날아갔다. 세븐틴 오프라인 공연이 처음이라는 건, 내가 세븐틴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지만 온라인으로 막연하기만 했던 '세븐틴 팬덤'의 실제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다. 들뜬 마음으로 덕메가 도착할 때까지 공연장 주변을 구경하며 배회했다. 야무지게 이런저런 나눔도 받고, 충동적으로 포카도 하나 샀다. 비가 올 것 같아서 입장 팔찌를 교환할 때 교환 데스크에서 우비까지 받아갔던 날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기억의 공연이 시작하기 전의 그날은 좀 밝았다. 사진을 보니 전혀 밝은 날이 아니었던 걸 보면, 극도로 흥분한 덕후의 마음은 시각적 인지 능력도 저하시키는 것이 확실하다.
콘서트 시작 직전, bgm 정도로 나오던 뮤직비디오 음향이 실제 공연 사운드 볼륨에 맞게 조절되면서 나는 사실상 기억을 잃었다. 살아 움직이는 세븐틴을 보는 것은 나의 예상 수준을 몇 십배 뛰어넘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세븐틴 본인들도 코로나 이후 첫 오프라인 공연이었다. 얘네 텐션도 평소같지 않아보였다. 비가 세차게 몰아쳤다.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일 때라 옷도 꽤나 두껍게 입고, 그 위에는 우비까지 덮어썼지만 결국 속옷까지 다 젖을 정도로 비는 점점 폭우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폭우 속에서 미끄러질까봐 몸 사리는 것 없이 뼈가 부서져라 무대를 하는 세븐틴과, 그를 보며 미친듯이 소고를 치는 수천명의 캐럿 소녀들. 나는 이 광경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이 벅차올랐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내 멘탈과 몸이 좀 힘들었을 때 도피처를 찾아 유튜브를 헤메이다가 세븐틴을 발견했고, 세븐틴을 보고 즐거워하는 힘으로 그 시기를 이겨내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멘탈과 몸의 회복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나, 그리고 직장과 학업의 병행이라는 스스로가 자처한 불행의 굴레에서 그 회복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으나, 그럼에도 분명히 나의 괴로운 시간을 이겨버리게 만드는 '하면 해'의 힘은 세븐틴에게서 나오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이겨내고 나는 너네를 무사히 보러왔구나. 너희는 이렇게 생겼고, 이렇게 움직이는 애들이구나. 내 눈으로 봐서 너무 기쁘다. 공연 막바지, 마지막 멘트를 하려고 나란히 멤버들이 앉아있었다. 멤버들이 갑자기 팬들만 비를 맞고 있을 수 없다며, 자기들도 지붕이 있는 무대를 벗어나 지붕이 없는 무대 앞쪽까지 의자를 빼서 앉았다. 같이 맞겠다는 거다. 그때부터는 그 전에 공연으로 채워진 기쁨과 도파민이 지금의 감동을 이길 수 없게 됐다. 이게 쇼잉이든 뭐든 '얘네는 진짜가 뭔지 안다'는 격동적인 감격이 온 몸을 휘몰아쳤다. 그날 나는 일기처럼 덕질의 흔적을 남기는 내 인스타 스토리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폭우를 좋아하는지 몰랐어."
폭우가 몰아치던 날과 달리, 일요일에 열린 마지막 팬미팅 날은 꽤나 화창했다. 금요일 첫 팬미팅 날 폭우를 맞아 너덜거리는 나의 불쌍한 소고를 최선을 다해 말려서 일요일에 다시 들고 갔다. 다소 흐물거리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밑 부분을 팽팽하게 잘 붙잡고 치면 나름 탱그러운 소리가 났다. 오늘이면 이 팬미팅도 끝난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팬미팅, 정말정말 마지막으로 멤버들의 멘트를 듣는 순간이 왔다. 이미 나는 내가 이번 팬미팅에서 얻을 감동과 감격을 예상치의 몇 배로 채워둔 상태였다. 더이상의 감동을 받을 순 없었다.
하지만 마이크가 우지에게 넘어가고, 나는 감동은 복리로 쌓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허무맹랑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제가 가끔 지금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게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사람들마다 다들 각자 응어리들을 지고 살아가잖아요. 남들에게 말 못할 부분일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맘들에게 기대고 싶을 수도 있고.
그래서 제가 더 힘이 있어서 여러분들의 응어리를 치료해주겠습니다! 하고 거창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근데 그렇지 않잖아요. 저도 똑같아요. 조언을 구할 때 다들 모범답안 같은 이야기를 하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말들을 가장 듣기 싫었거든요. 마음은 고맙지만 태평한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더욱 제가 캐럿들의 어려움을 없애버리겠습니다 하는 거창한 이야기를 못 해드리는 거긴 한데,
저도 캐럿들과 같은 상황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같이 손잡고 걸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가치가 되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거창하진 않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기에 감사해요."
나는 그때 들은 우지의 멘트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멘트를 통해, 나는 내가 덕질을 시작한 이유와, 내가 이 아이들에게 이렇게까지 빠져든 이유와, 앞으로도 빠져나가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 이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이 세븐틴이라는 그룹이, 적어도 이 우지라는 아이는 '같이 가는 마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체감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이든지간에 위로가 되었든 힘이 되었든 '무언가'가 되는 사이가 되었던 거다. 나는 너희 덕에 같이 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런 나도 너희에게 어떤 가치가 되어줄 수 있었던 거다. 나는 같잖은 위로 대신 사람의 마음을 채우는 진심을 이렇게 표현할 줄 아는 정말 멋진 아이들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런 애들을 덕질하다니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같이 가는 마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기분이 어떤지, 누가 물어볼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질문은 나만 나에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자문자답한다. 진짜를 아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행복을 탄 채, 아직도 여전히 얘네랑 같이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