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똘하지만 정신머리 없이 살아가던 12살의 나는 열렬하게 god 덕질을 해오던 소녀였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벌써 같은 팸 언니들과 함께 일산-서울을 오가며 공방도 다니고, 숙소가 있던 동네도 기웃거리던 철딱서니 없던, '이 정도면 다 컸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니던 그 때의 나에게, 12년의 인생에선 겪어보지 못했던 꽤나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 god의 맏형 박준형이 퇴출된다는 소식이 방송이며 인터넷의 모든 연예면 메인 소식을 장식하고 있었다.
god에서 박준형이라는 멤버가 갖는 상징성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2001년 그때나, 그룹의 25주년 콘서트를 공영방송이 직접 열어주는 지금이나 매한가지로 어마어마하다. 내 성스러운 덕질 에세이에서 왜 당시 소속사가 퇴출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내렸는지에 그 이유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건 납득이 전혀 안되는 상황이니, 정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검색해보시길. 각설하고, 그런 멤버를 갑자기 빼겠다고?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이지? 내 안에 무언가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고학년이라해도 보통 초딩들은 머리나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면 달아올랐지, 식는 걸 경험할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내가 혼자서 머리 컸다고 착각하고 다닌 건방진 초딩일지언정, 인생 경험과 그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의 높낮이는 하찮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는 머리가 뭔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짧디 짧은 인생, 고작해야 친한 사람, 안친한 사람 정도의 바운더리 안에서 살던 나로선 '적'이 생긴 느낌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나만 그랬을 리 없다. god의 전체 팬덤이 들썩였다. 소속사의 일방적인 멤버 퇴출 결정을 철회시키기 위해 공식 팬클럽과 수많은 팬사이트들이 연합했고, 일종의 행동지령같은 것들이 내려왔다. 기사를 찾아보니 당시 팬사이트 연합에는 260개의 팬사이트와 카페 등이 참여했다고 한다(연합뉴스 2001.9.12 'god 팬클럽, 사이더스 상품 불매 운동' 기사 참고).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단합한 덕후들의 공격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건, 내 인생 최초로 '단체 행동'에 참여한 경험이기도 했다.
가장 크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당시 소속사 이름이 박혀있는 모든 물건을 소속사 주소로 반송시키는 거였다. 그때의 내 심정이 꽤나 비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 반송이지, 팬들의 소속사에 대한 일방적인 소포(당시엔 택배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공격이었다. CD와 카세트테이프, 팬클럽 우비 등 소속사의 이름이 있거나 소속사가 주도해서 만든 굿즈들은 모두 반송대상이었다. 나 역시 집에 있는 모든 굿즈를 뒤져서 소속사의 이름이 앞글자 하나라도 있는 경우엔 무조건 박스에 모았다. 보내려니 아깝긴 했다. 하지만 감상에 잠시 빠져있다가도 씩씩하게 박스테이프를 두르고, 우체국으로 그 박스를 당당하게 들고 가서, 아주 단호한 얼굴을 하고선 이걸 서울로 보내달라는 송장을 작성했다. 초딩으로서는 사실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덕질 앞에서는 다소 금전 감각이 떨어지는 나로선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이건 전쟁이니까', 라고 생각하며 소포 박스 위에 매직으로 크게 '5-1=0'이라고 적었다. 난 정말 비장했다.
처음으로 모금도 해봤다. 유력 일간지 1면에 소속사의 이번 결정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지 광고를 낼 예정인데, 이 광고비가 매우 비싸니 팬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호소문이 모든 팬사이트와 팬카페를 뒤덮고 있었다. 초딩 덕후가 용돈을 받아 어디에 쓰겠는가? 떡꼬치를 사먹을 약간의 돈을 남겨두고 기꺼이, 아낌없이 돈을 송금했다. 나는 이미 팬클럽 가입비를 내기 위해 혼자 은행에 찾아가 인생 최초의 무통장 입금 거래를 해본 경험이 있는 초딩이었다. 짜치기 그지 없지만 어쨌든 돈도 있었고, 은행 거래에 대한 지식은 미약하기 그지 없었으나 어쨌든 경험도 있었다. '이 전쟁에 나의 티끌도 보태리라'. 초딩이라고 참여하지 못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아직도 종종 회자되는 사건인 만큼, 그 당시 연예계에선 이 사건이 굉장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팬클럽 연합이 기자회견도 열거나 단체행동을 할때마다 기사도 떴다. 그때마다 나는 열렬한 댓글부대가 되어서 팬클럽 연합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소속사를 비난하는 어딘가 어설픈 댓글을 구구절절 달곤 했다. '비록 나는 초딩팬이지만, 언니들에게 힘을 실어주리라'. 당시 나는 연대의 힘 또는 연대의 중요성, 이런 사회 교과서에 나올만한 개념을 어렴풋이 체득하고 있었다.
광고 상품 불매도 그때 처음 참여해 봤다. 상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랍시고 그들이 광고 모델인 상품을 계속 소비해주면 소속사가 팬들을 우습게 볼 거란 논리였다. '아, 나는 팬이지만 소비자이기도 하구나'. 무언가의 애호가이자 철저한 소비자이기도 한 덕후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실감한 것도 그 사건이 계기였다.
여러모로 이 사건과, 이 사건을 겪은 팬덤과, 그 팬덤속의 나는 무언가를 각성하게 된다. 아이돌 덕질의 역학 관계에는 덕후와 가수만이 있지 않다는 것을. 여기에는 무언가 공급과 소비가 일어나게 하는 '회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덕후는 가수만을 바라보며 덕질을 해서는 안되는 것을. 이 역학관계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멍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이어가려면 할 말은 하면서 덕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무언가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는 오직, 가수를 향한 나의 감정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겪은 것은 아니나, god의 이 사건(?) 이후에도 다른 팬덤에서 역시 그들의 사정에 따라 크고작은 단체행동을 겪어야 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사안의 경중에 따라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관련 법 전문가가 되기도 했고, 의미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며 아이돌 산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기기도 했다. 대단한 사안이 아니더라도 팬들 눈에 회사가 그들의 본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팬들은 팩스와 이메일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공'을 벌여왔으며, 급기야는 '성명문'을 내기도 한다. 불행히도 나는 이 짓을 내가 어떠한 팬덤에 속해있든 한번 이상은 반드시 직접 경험하거나, 혹은 목도해야 했다. 덕후들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간에, 그리고 그 주장이 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단체의 형태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익숙하다.
소속사나 기획사가 일방적인 빌런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이건 아마도 내가 나이를 한살한살 먹어가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이나마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룹이 그룹과 그룹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소속사의 노력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팬으로서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결과물 곳곳에서 그들의 수고로움을 느끼곤 한다. 혹시나 이 글을 보시는 소속사 분들이 절대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돌 덕후로서 리스펙하는 관계자분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팬은 가수를 향한 덕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비자라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진을 향해 무지성으로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지만, 때로 이해 안가는 결정이나 상황에 대해 걸고 넘어질 수도 있다. 덕후가 지닌 아이돌을 향한 애정이 회사에 의해 때로는 지나치게 이용당하거나, 혹은 간과되는 상황말이다. 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무지성으로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 소비자지만, 그리고 꽤나 자주 '나는 얘네 앞에서 ATM에 불과해'라고 스스로들 생각하는 호구에 가까운 소비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드물긴 하지만 정말 불행하게도, 이러한 팬들의 목소리가 회사가 아닌 그룹이나 멤버를 향할 때도 있다. 이때도 핵심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너희에게 무한정 애정을 퍼주고 있지만, 이 무한정 애정이 그 어떠한 상황에서든 무관하게 항상 생겨나는 로봇같은 애정 생성기는 아니야'. 그 상황이 무엇인지는 불행한 일이므로 일일이 사례를 열거하진 않겠다.
덕후가 보내는 모든 애정, 그리고 이 애정을 뒷받침하는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 정도의 좋아하는 마음이 뒷받침되기에 덕후들이 기꺼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꺼내놓고, 감내하는 것들이다. 이 감정이 어떠한 주요한 결정들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낀 순간, 덕후는 목소리를 낸다. "우리가 ATM이라고 해서, 감정까지 없는 건 아니야".
god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모두가 알다시피 모든 멤버가 끈끈하게, 25주년을 맞은 올해까지 활동하고 있다. 여전히 나에게 5-1=0이다. 물론 나는 문과다.
단합한 덕후들의 전투력은, 때로는 거윗과 골리앗같은 싸움에서 이기기도 한다. 그리고 꼭 이기지 않더라도, 덕후들이 단합해서 무언가를 위해 같이 움직이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로가 된다. 이것도 일종의 연대의 힘 아닐까.
그러니까 덕후들이여, 무지성 덕질이라고 해도 때로는 주변을 잘 살펴보면서 무언가가 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당당히 함께 목소리를 내자. 우리는 좋아하는 대상 앞에선 온갖 것을 다 내놓아버리는 어쩔 수 없는 ATM 그 자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까지 없는 건 아니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치지 않아야 하는 건 우리의 '좋아하는 마음', 그 감정 자체니까.
앗, 인터넷 세상에 널려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어그로꾼 여러분, 여러분들께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