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일본에 가려면 'Visit Japan' 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입국 전 자신의 정보를 입력하는 절차가 생겼다. 2023년, 올해 들어서만 일본 방문은 네 번째, 그 중에서도 도쿄는 세 번째였다. 이쯤되면 이런 입국 절차는 1분컷으로 할 수 있다, 고 착각했다. 역시 나는 착각을 잘 한다. 이 질문 앞에서 내 머리가 멈췄기 때문이다.
'일본 내 연락처: 체류지, 호텔명 (필수)'.
나는 체류지가 없었다. 체류하는 호텔도 없었다. 이런 게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인천에서 비행기가 이륙한지 20시간만에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비행 시간을 빼면 일본 땅에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건 15시간이 채 안될 것이다. 그런데 체류할 곳을 적으라니, 없는데 뭘 적지? 불법체류자가 되는 길이 이렇게 가까웠단 말인가?
'우동이 먹고 싶어서 일본에 다녀왔어^^' 같은 이런 비행스케줄을 잡게 된 것은, 내가 일본에 가는 건 일본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븐틴의 도쿄 콘서트에 가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직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연차가 충분치 않았고(심지어 이미 예정된 연차가 수두룩했다), 일본에 워낙 자주 갔어서 더이상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며, '이건 여행이 아니라 그저 콘서트가 비행기 타고 가야 하는 지역에서 열리는 것일 뿐이니, 그냥 콘서트만 보고 오자'는 안일한 마음으로 당일치기 비행기를 예매했다. 심지어 예매 당시, 난 나의 계획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급기야는 기특하다는 생각을 한다.
9월 초는 태풍이 잦은 시기니 혹시나 모를 비행기 연착에 대비해 아침 7시반에 떠나는 비행기를 타자. 그러면 팝업스토어도 갈 시간이 있을 거야!: 적은 시간을 알차게 쓰는데다, 계절 기후 특성까지 고려한 아주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콘서트가 밤에 끝나니 자정 이후에 뜨는 비행기를 타야겠지? 새벽 2시 비행기로 도쿄를 떠나 새벽 4시 반에 인천공항에 내리자: 새벽 2시에도 도쿄와 서울을 오가는 비행기가 있다니, 이 얼마나 글로벌한 세상인가! 라고 감탄했다.
바로 출근하긴 힘들테니, 캡슐호텔에서 잠깐 잔 다음 홍대에 있는 공유오피스로 출근하자: 심지어 출근까지 챙기는 K-직장인 나, 제법 성실해요. 월급 받을 자격이 있어요. 라고 스스로를 치켜세웠다.
이 모든 것이 콘서트 티켓 당첨 소식 이후 엔돌핀에 미쳐서 앞뒤 생각 없이 펼쳐버린 객기에 불과했음을, 일본 내 체류지를 적으라는 질문 앞에 당도해서야 깨달았다. 와, 나 체류할 곳이 없네. 엄청 피곤할 것 같은데 내가 저 일정을 소화할 수 있나? 너무 졸릴 것 같은데 그러면 어디서 자야되지? 내가 미쳤나? 어차피 펑펑 땡겨 쓸 휴가 하루 더쓴다고 큰일 안나는데 왜 저런 미친 일정을 예매했지? 스스로가 어처구니 없었다. 고민 끝에 빈 칸에 'TOKYO DOME'이라고 썼다. 이런 걸로 입국을 거절시키진 않겠지. 하지만 이 때부턴 입국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난 도쿄에 도착한 후, 시간 계산을 잘못 해 미리 예약해둔 팝업스토어 입장은 실패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콘서트 시작 30분 전까지 도쿄돔 바로 앞에 있는 스파에 누워있는 일정을 보내고 온다. 콘서트 때 잠깐 살아났지만 그 기운은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빠르게 소멸되었고, 결국 나는 좀비 그 자체인 모습으로 인천에 도착해 캡슐호텔에서 기절 엔딩을 맞이한다. 출근을 하긴 했다.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몸뚱이만 덩그러니 사무실에 간신히 놓아뒀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그렇게 나는, '서울-도쿄 20시간만에 왕복해 도쿄돔 콘서트 무사히 보고 출근까지 해내버리기'라는, 상당히 쓰잘데기없지만 어쨌든 인생에서 경험하기 쉽지 않을 퀘스트를 달성해낸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나의 크고 작은 '덕질하다 인생 경험치(XP) 레벨업' 에피소드 중 하나일뿐이다. 웹소설스러운 이 제목의 시리즈에는 꽤나 갓생스러운 내용도 있고, '이렇게까지 해야겠냐'싶은 내용도 있다. 어쨌든, 나는 덕질을 하면서 내 인생의 경험치를 수도 없이 레벨업했다.
사람마다 정말 참지 못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을텐데, 내 경우에는 잠이다. 특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정말 참을 수가 없다. '늦게 자서 잠이 부족'한 것도 개탄스러운 일이지만, '일찍 일어나서 잠이 부족'한 건 인간의 존엄성을 건드리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본인의 뇌로 생각하기 시작한 어린이 시절부터 30대 중반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이 아침잠에 대한 나의 집착은 신념에 가깝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든 운동이든 명상이든 하여튼 무언가를 하자는 '미라클모닝' 열풍이 불 때, 그 열풍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침잠까지 줄여가며 자기계발을 하라니 이게 나라냐'고 한탄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스케줄이 생기면 그 순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곤한다.
그런 내가 자진해서 새벽 네시에 일어난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이었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이불을 박차고선 전날 인쇄한 백장이 넘는 하늘색 종이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 하늘색 종이는 손호영의 생일을 축하하는 벽보였다. '오늘은 하늘에서 미소천사가 내려온 날입니다'로 시작하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지만 그 당시에는 한줄한줄 타이핑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던 그 생일축하 벽보를, 주변 아파트 단지 네 곳을 돌아다니며 전부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인생에 몇번 있을까 말까한 자진 새벽 기상을 기념하며 학교에도 일찍 등교를 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체력이 말짱했던 때라, 하교 후에는 다시 내가 벽보를 붙인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벽보를 깨끗하게 떼내어서 '뒷처리까지 잘 하는 개념있는 팬지오디'의 소임을 다했다.
무엇이 나를 자진해서 새벽에 깨어나게 만들었을까?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부담이 아니었을 리 없다. 실제로 못 일어나서 같이 벽보를 붙이기로 한 친구가 덩그러니 나를 기다릴까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나는 잘 일어났고, 무사히 벽보를 다 붙이고, 심지어 학교까지 일찍 갔다(등교와 출근을 힘들어하는 나로서는, 실로 엄청난 일이다). 이걸 가능하게 한 건, '호영오빠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다'는 꽃밭 덕질의 기쁨에 가득찬 마음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침잠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해선 하지 않는 것이 또 있다. 웨이팅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내 차례를 위해 막연하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개인적으로 맛집이나 핫플레이스에 대한 감흥이 덜한 편이기도하고, 원체 성격이 급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걸 참지를 못하는 성미인지라 어딜 가서 웨이팅을 해야한다고 하면 내 계획에서는 간단히 아웃된다. 그런데 아침잠까지 포기하고선 웨이팅을 하라고? 싸우자는건가?
하지만 나는 이걸 즐거운 마음으로 한 적이 있다. 공개방송에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 방송국의 음악프로그램 공개방송에 가는 건 아침잠도 포기하고, 웨이팅까지 해야하는 일이다. 지금은 미리 선착순 방청 신청을 받지만, 2000년대 초반 라떼는 직접 줄을 서야 했다. 하지만 난 이걸 자진해서,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하곤 했다. 밤샘 웨이팅을 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녹화장에 못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빠들의 출근길과 퇴근길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보상이 됐다. 아직도 나는 정발산역에서 같은 팸 언니들을 만나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 방송국 앞에 가득한 하늘색 풍선 어딘가에 자리를 맡아둔 다음,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튀김우동 컵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아, 내가 지금 새벽에 깨어있구나'를 실감하던 그 새벽공기가 생생하다.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어떤 마음은, '내가 정말 죽어도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겨내서 새로운 경험치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그걸 일찌감치 체험했다.
신입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내가 속한 사회부 경찰팀 선배들을 만나는 회식자리에서, 한 선배가 '기자는 뻗치기를 수도 없이 한다'고 말했다. 참고로 뻗치기는 취재 대상이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무작정 나타날 때까지 버티는 걸 이르는 말이다. 그 말을 듣자,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는 공방 다니던 빠순이 출신이라, 뻗치기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 당시에는 선배들이 비웃었을지 모르나, 실제로도 나는 내가 기자가 되어서 했던 모든 일중에 그나마 뻗치기가 할만했다. 수습 시절, 어떤 고위 인사가 연루된 꽤나 지저분한 로비 사건이 터졌는데, 관련 인물을 만나기 위해 나를 포함한 수습기자 몇명이 그 인물이 산다는 아파트를 수소문해서 복도에서 함께 뻗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약한 수습기자들은 자신의 몸을 바스락거리는 패딩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는 따뜻하게 데운 삼각김밥 세개를 들고선 그 사이를 유유하게 지나가서 신문지를 착착 펼쳐 돗자리화한다음 그 위에 여유롭게 누웠다. "아, 신문지 나도 가져올걸." 다른 수습기자가 부러워했다. '훗, 이것이 바로 뻗치기 경험자의 여유라고'. 물론 그날의 뻗치기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날 밤, 나는 덕질이 길러준 '나타날 때까지 버틴다'는 근성이 근육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한다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면, 남들이 보면 '이렇게까지 한다고?' 싶은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된다. 덕질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실제로 '내가 별 짓을 다 한다'고 어이없어하면서도 그 별 짓들을 묵묵하게 해내버린다. 누구는 서치를 기가막히게 해내고, 누구는 굿즈를 공장처럼 뽑아내고, 누구는 체력을 극한까지 시험하면서도 그 일들을 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인생의 경험치를 늘려나간다. 그게 뭐 유용한 경험치인지 아닌지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서든 별 일을 다 해내버리고 마니, 확실히 인생을 약간은 더 다채로운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나만 해도 나는 덕질을 하면서 앞선 에피소드 외에도,
일본어를 배워서 자격증까지 땄고, 더 높은 급수에 도전하려고 9개월째 꼬박 일본어강의를 듣고 있다: 일본어 공부는 세븐틴이 일본 앨범도 자주 내고 공연도 자주 하기 때문에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을 원하는 공연으로 보낼 정도의 티켓팅 재능기부가 가능해졌다.
선물 박스를 두 가지 색의 리본으로 예쁘게 묶을 줄 안다.
초등학교 시절엔 덕질 덕분에 포토샵을 배웠다.
지금 이런 덕질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13편이나 끄적이고 있다.
등을 해냈다. 하찮지만, 자랑스럽다.
어디선가 경험을 사는 데에는 돈을 아까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줏어 들은 적이 있다. 물건이나 먹을 것이나 뭐 그런 것에 돈을 쓰면 그 소비는 순간이지만, 경험을 사는 데에 돈을 쓰면 그 소비의 여파가 꽤나 길게 간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물론 나라는 인간은 물욕도 심상치 않게 많은 사람이기에 이 말에 썩 해당하는 사람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덕후로서 이 말에 한마디를 더 보태고 싶다. 경험을 사는 방법 중 하나가 덕질이라고, 그리고 이게 꽤나 치트키라고.
이런 글을 끄적이는 지금도, 내 인생의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XP 게이지는 차곡차곡 채워지는 중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