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이미지는 이번 여름에 열린 인피니트 콘서트에서 제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화질이 구린 이유는 제가 직접 찍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경찰서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찰서는 본인이나 가족이 경찰이거나, 경찰서에 뭔가를 납품한다던가 하는 일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갈 일이 없는 관공서다. 그런 나는 몇달 간 경찰서에서 영혼처럼 떠돈 전적이 있다. 내 인생에서 해서는 안 될 범죄를 저질렀기때문, 은 다행히 아니고, 꿈을 이뤄서 도착한 곳이 경찰서였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부 기자로 첫 사회 생활의 발을 내딛었다.
나는 고등학교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외교관->뮤지컬 넘버 작곡가->기자'라는 극단적인 장래희망 변동을 겪었다. 누군가는 이 시기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고민이라는 얘기를 했었는데, 나는 반대로 '당장 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렬한 마음이 드는 게 고민이었다. 18살 당시에 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면, 그건 사회의 부조리함을 당당하게 까발리는 것처럼 보이는 기자라는 직업이었다.
사실 기자를 꿈꾸게 된 계기도 덕질의 연장선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강렬하게 경험한 14살의 소녀는 그 후로도 잔잔바리로 김남일을 포함한 축구선수 덕질을 이어오다가, 17살 언저리에는 박지성에게 정착한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2000년대 후반기는 '소몰이 창법'을 곁들인 절절한 유행가들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을 때였다. 아이돌 그룹 대신 발라드 솔로 가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발라드를 들으면 '아이고 덥다 더워'하며 기피하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고딩의 나로선 가요 세상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러나 한번 덕후로 태어난 자는 덕질을 끊을 수 없다. 나는 신한은행에서 만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체크카드를 통해 수혈받은 용돈으로 교보문고에 가서 베스트 일레븐 잡지를 사보고, 새벽에 밤새서 해외 축구를 보다가 2주 연속 다래끼가 나고, 인강을 듣기 위해 산 PMP(태블릿PC 같은 거 없던 라떼는 PMP로 인강들었다)에는 프리미어리그 시즌 주요 골 장면을 모은 하이라이트 영상을 저장해두곤 공부가 하기 싫을 때마다 종종 쾌감을 수혈하기 위해 재생하곤 했다.
그런 나는 아빠와 함께 2006년 삼일절, 대한민국과 앙골라 축구 평가전을 보러간다. 당시 아빠가 방송국에서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계셨기 때문에, 나는 그 평가전을 중계석에서 관전할 수 있는 관계자 찬스를 얻었다.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안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날의 평가전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나 역시 K-박지성덕후고딩으로서 그날의 평가전을 두근거리며 눈에 담았다. 박지성 경기를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그날 경기는 유독 눈에 생생하게 담겼다(사실 나는 '꿈☆은 이루어진다'로 유명한 2002월드컵 대한민국-독일 4강 경기를 상암에서 직관한 인생 자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중딩때는 뭣도 모르고 봤다면 고딩때는 약간의 무엇을 알고 봤기에 더 새로웠던 것 같다. 아마도 후반전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그날 경기 도중엔 눈도 내렸다. 아프리카에서 온 앙골라 선수들이 경기 도중인데도 그라운드에 서서 하얀 눈을 바라보던 장면이 동화처럼 남아있다. 경기가 끝나고 '역시 직관은 너무 재밌다'고 생각한 나는, 30분 후 17살의 짧은 인생 뒤통수를 후려칠 정도의 강렬한 '기자 장래희망' 열망이 생길 것이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경기가 끝난 박지성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고 있었다. 주변에 기자들이 있었다. '각잡고 박지성에게 오늘 경기의 소감을 물어보려나 보다', 순진한 17살은 으레 뉴스에서 나오던 인터뷰 장면을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장소는 인터뷰월이 아니었고, 카메라도 안 보였다. 그냥 통로였을 뿐이다. 열명 남짓한 기자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박지성에게 마치 친한 형처럼 말을 걸었고, 박지성 역시 그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듯 웃으며 대답을 해줬다. 그들은 서로 '알고 지내고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기자는 이 재미난 직관이라는 '현장'을 누비는 것도 모자라, 당시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고의 스포츠스타와 친근하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직업이구나. 나는 그날 집에 가자마자 스포츠 기자, 기자, 기자되는 법, 기자 입사 따위를 검색했고 당시 영국에서 직접 프리미어리그 현장을 취재하며 기사를 쓰던 한 기자에게 '기자언니 너무 멋있다 & 저는 더 멋진 기자가 되고 싶다'는 앞뒤 안맞는 자기주장 가득한 팬레터를 날린다. 그 기자는 너무나 친절하게 나를 응원한다고, 자기보다 더 멋진 기자가 되어달라는 답장을 보내줬다. '기자'라는 꿈을 대학교까지 흔들리지 않고 가져가게 된 순간이다.
실제로 나는 그 이후 단 한번도 장래희망이 바뀌지 않은 채 대학교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기자'가 되기 위해서 달린다. 내가 생각해도 꽤나 열심히 살았다. 어쩔 수 없는 취업의 벽에 언론사 외에 다른 기업에도 원서를 무수하게 넣기야 했지만, 혹시나 면접이나 인적성, 필기 시험등이 겹치게 되면 무조건 언론사로 갔다. 언론고시라 불리우는 그 특이한 언론사 시험에 주력한 지 일년 정도 됐을 때, 드디어 나는 한 언론사 공채에 합격한다. '꿈을 이루는' 일이 나에게도 벌어진 것이다. 나는 무척 행복했다.
그리고 빠르게 불행해졌다. 입사한 지 2주일도 채 안됐을 때부터다. 대학 시절 이런저런 연으로 만나게 된 기자 선배들로부터 수습 시절이 얼마나 힘든지, 수습을 떼도 기자 생활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가지 버전으로 전해들었으나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컸기에 그 정도야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내가 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여러가지를 깨달았다. 그 중에 하나는 나는 생각보다도 더 '나의 안위'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수습 시절에는 일단 잠을 잘 못 잤다. 요즘엔 안 그러는 것 같긴 한데, 내가 입사했던 10년 전에는 밤 10시 언저리부터 새벽 세시가 넘을 때까지 '마와리'를 돌고 두시간 정도 눈을 붙인 후에, 새벽 다섯시반에 선배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새벽 다섯시반에 보고를 하는 건, 세시간 전과는 또다른 보고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루에 세시간을 푹 자는 일이 드물었다. 문제는 나는 잠이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 잠을 충분히 못자면서 이루 셀 수 없는 오만가지의 문제가 나에게 닥치게 된다.
술이 유독 안 받는데 이놈의 직업은 술도 잘해야 했다. 당시 내가 입사한 회사는 여러 언론사 중에서도 유독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다. 선배들이 권하는 술을 강제로 마시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일부는 '너 그래서 어떻게 기자할래' 소리가 듣기 싫어서 오기로도 버텼다. 그리고 회식이 끝나는 밤 10시~11시 사이에 경찰서로 돌아가서 일단 토하고 마와리를 돌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관악경찰서 화장실 한 칸을 차지하고 장기까지 꺼낼 기세로 토하던 몇 날의 밤들이 생생하다.
수습이 끝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물론 잠은 좀 더 자고, 술마시는 회식은 많았지만 '수습기자 주량 늘리기 훈련'은 사라졌다. 그렇지만 일이 너무 어려웠다. 퇴근을 했는데도 집에서 기사를 처리하거나, 주말 새벽 갑작스런 취재 지시 전화에 공항으로 달려가야하는 등의 몇 번의 일들을 겪으며 내가 워라밸을 극도로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대학생 때의 나는 '워커홀릭'이 되고 싶다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사회부 기자는 사건사고를 취재하게 되는데, 그 사건 하나하나는 극단적으로는 누군가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당사자들을,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기자라는 명함 하나들고선 그래도 되나? 내 이름이 바이라인으로 남아있는 기사가 포털에 걸리는 것도 체할 것 같은 부담이었다. 그 와중에 내가 이 본격적인 직업 세계에 뛰어들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게 곡할 노릇이었다.
수습 후 첫 정식 라인으로 영등포라인에 배정되었는데, 당시 내 눈에 영등포 경찰서 기자실에 빼곡하게 앉아있는 선배들은 너무나 '으른들' 같았다. 그 사이에선 전화를 하는 것도 불편하게 느껴져서 이상한 옥상 계단 같은데로 피신해서 취재인 척 하는 허술한 전화를 돌리곤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난 어른이 된게 아니고 어른을 연기하는 중 같았다. 하루는 어떤 선배가 내 옷차림을 보고 '너는 수습 딱지를 뗀지 몇달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대학생같냐'고 핀잔을 줬다. '아니 그럼 몇달전까지 대학생이었던 애가 어떻게 갑자기 어른 기자가 되겠냐!!!' 빈정이 상해 그 이후엔 아예 전체가 글리터로 덮여 있는 탐스 슈즈를 신고 다녔다. 누가 봐도 나의 정신머리며 행색이 (나쁜 의미로) 어른이 되지 않았는데, 출입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찐 어른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일을 해내는 것이 무척 버거웠다. 어른 세계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버거웠다. 그렇게나 염원하던 직업이 나에게 맞지 않은 직업이었다니, 그 사실에 문득 우울한 마음마저 찾아왔다.
역시 음악은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 맞나보다. 당시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숨쉴 틈은 멜론 플레이리스트를 bgm삼아 틀어놓고 이동하는 택시 안이었다. 내가 선택한 음악들이 아니라 그냥 Top100 순위 중에 이름이 괜찮아보이는 노래들을 찍어서 듣고 다녔다. 그 당시의 나는 뭔가를 선택할 기운조차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남자가 사랑할 때'라는 노래를 듣게 되고, 누가 불렀나 봤더니 이 노래가 대학 시절엔 '노래 제목이 저게 뭐냐'고 비웃던 '내꺼하자'를 부른 인피니트의 노래라는 걸 알게 됐다.
이 청량한 노래는 나에게 어떤 색감을 느끼게 했다. 당시 내 눈에 익숙한 색깔들은 경찰서의 회색, 또는 경찰서 사무실에서 종종 보던 초록색 책상깔개같은 '노잼 으른들의 색'이었다. 노래를 연이어 재생할 때마다 회색 벽과 청록색 책상깔개의 향연에서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회색과는 또다른 청량한 색들이 내 머릿속에 차올랐고, 해방감이 느껴졌다. 으른들의 세계가 아닌 나의 세계가 있다면 이 색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벅차올랐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곡은 '추격자'였다. 성규의 날카로운 보컬과 남우현의 호소하는 보컬이 마구 크로스되는 후렴구를 들으며, 으른들의 세계에 갇혀버린 내 철딱서니 없는 영혼이 인피니트로부터 추격당하는 기분이 들어 통쾌했다. 경찰서 기자실 맨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일하는 선배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몰래몰래 인피니트의 다른 노래들을 연이어 듣고 노트북 한 칸에 뮤직비디오를 작게 띄워둔 채 기사를 얼기설기 채워나갔다. 이 어른들 사이에서, 이 회색의 향연 속에서 나 혼자 내 색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한 달도 안되는 기간이 흐르고나니 나는 어느덧 롯데리아에서 '인피니트 팩'을 주문하고, 갑자기 점심으로 햄버거를 제안한 나를 따라 영문도 모른채 롯데리아로 함께 와준 선배 귀에 혹여나 들릴까 노심초사하며 '포토카드는 남우현으로 주세요'라고 점원에게 속삭이는 어엿한 인스피릿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채 1년을 채우지 못한 짧은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그 시간을 꾸역꾸역 버티게 한 내 플레이리스트는 인피니트가 접수해버린다.
물론 기자 생활이 모두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좋은 선배, 동기도 많이 만났다. 잔잔한 보람도 있고, 성취감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것들은 내가 부담스러워하는 어떤 세계를 극복하거나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진 못했다. 되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직업을 왜 버텨내질 못할까'라며 자책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때가 더 많았다.
오히려 그때를 버티게 한 건, 내 눈에서 보이는 색깔과는 또다른 색을 떠오르게 한 플레이리스트였다. 어른들의 진지하고 엄중한 말들이 가득한 어떤 자료들이 아닌,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고음에 착착 맞아 떨어지는 쾌감 넘치는 칼군무였다. 인피니트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이 회색빛의 으른들의 세계와 분리된 기분이 들었다. 경찰서 구석탱이에서 인피니트를 찾아보며 경험했던 그 쾌청함은, 나를 속시끄러운 고민에서 잠시나마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꽤나 긴 공백기를 가진 인피니트가 올해 아예 '인피니트 컴퍼니'를 차려서 5년만에 앨범을 내고, 여기에 그치지않고 무려 7년만에 콘서트를 열었다. 첫 콘서트에 간 나는 청승맞게 시작부터 훌쩍이며 인피니트에게 최선을 다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돌아와줘서 고맙다고, 나 너네 덕분에 그 때 그 시기를 버텨냈다고. 잘 전달됐으려나 모르겠다. 다음번에는 조금 덜 훌쩍이고 정신을 좀 더 집중해서 보내봐야지. 이건 정말 꼭 전해졌으면 하는 고마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