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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해 Feb 07. 2023

세상과 다른 궤도로 살아가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우리는 흔히 이야기한다. 정해진 삶의 루트가 있다는 말을. ​입시, 취업, 승진, 결혼, 육아, 노후.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는 거의 이 삶의 방향을 따른다. 여기서 벗어난 사람을 쉽게 볼 수 없다. 최근 결혼이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되면서 싱글 라이프를 영위하는 이들이 늘어났지만 결혼과 육아를 제외하더라도 노후를 향해 달려가는 건 엇비슷하다. ​


나도 십이년 간의 학창 생활을 마치고 입시를 거쳐 회사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승진을 하는 동안 나는 안타깝게도 여러 회사를 전전하느라 만년 신입 사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하나 둘 시집 장가를 가는 나이가 되었는데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1인분의 몫만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점점 나이가 드는 부모님을 떠올리면 갑자기 1인분이 3인분으로 부풀어 오르며 점심에 먹었던 것이 툭 하고 올라오는 기분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나의 노후는 누가 책임져 줄까. 그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고민은 많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도, 혼자의 삶을 살아도 늘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중요한 건 나는 이 궤도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 프리랜서로 살아보겠다는 욕망도 없다. 그래서 무얼 할 거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하지 않을 것들은 안다. ​무리하게 대출을 해서 서울에 집을 사는 일, 대출금을 갚느냐 청춘을 바치며 뼈 빠지게 일하는 일, 결혼과 육아로 내 커리어를 중단하는 일, 노후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일.

이 모두가 맞다고 하며 한 방향으로 가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왜 꼭 서울에 살아야 하는지, 왜 꼭 한강뷰 아파트가 최고의 가치인지, 일과 돈에 매몰되어 왜 소중한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하는 것인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의 노후를 얼마나 철저하게 대비해야 하는 건지.




나는 사람들이 돈과 부를 원하면서 정작 그것들을 알맞게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바라본 세상은 과잉이었다. 생산의 과잉, 정보의 과잉, 소비의 과잉, 그리고 과시 그 자체.

호텔에서는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 양이 상상을 초월한다. 한 층에서만 큰 통으로 하루에 두어 차례 나온다. 먹다 남긴 음식만 음식물 쓰레기라고 하면 덜 억울하다. 손님이 건들지도 않은 음식들이 즐비하다. 매일 셰프들은 그 요리를 만들어내느냐 정신없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사람들 손에 닿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정성을 다해 만들었던 요리는 어느새 음식물 쓰레기로 둔갑한다.


사치스러움과 거리가 멀 것 같은 서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고 서점에 손님들이 가져와 팔지 못한 책들이 쌓인다. 새 책이나 신간에 가까운 것도 있고 오래된 정통이 느껴지는 도서들도 있다. 그러한 것들은 정해진 기준에 이탈했다는 이유로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들은 따로 분류해놓고 ‘폐기’라고 부른다. 근무 초반에는 멀쩡한 책들 찣어버리는 것을 보고 어찌나 놀라고 아까웠던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왔던 책의 가치가 한순간에 종이 쓰레기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어디선가에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밤낮을 쏟으며 일하고, 또 다른 어디선가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버린다.

생산의 과잉이 소비의 과잉으로 이어지고 소비의 과잉은 결국 폐기물들의 과잉으로 이어진다. 불과 몇 분 전, 며칠 전까지 반짝거리며 유혹했던 것들이 겉모습은 똑같은데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고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약간의 훼손이 됐다는 이유로 사라져야 할 대상이 된다.

인간도 그럴까? 나는 똑같은데 상품화폐경제시대에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기업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외모가 준수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내 가치는 추락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

자취를 하면서 깨달은 점은 넘쳐나는 삶보다 약간의 부족한 삶이 좋다는 것이다. 내가 산 게 뭔지, 혹은 왜 샀는지도 모르는 삶보다 내가 구매한 물건이 어떤 건지, 나에게 어떤 효용과 의미가 있는지 알고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삶. 그것이 물건이든 음식이든 사람이든 하나하나 소중히 아끼며 음미할 수 있으니까, 더도 덜도 아닌 딱 알맞게 사는 그 감각이 좋다.



​​​


다시 돌아와, 부를 향해 달려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비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안락한 내 집 마련이든, 아이를 위한 투자이든, 안전한 노후 생활이든 소비를 바탕으로 꿈을 이룰 생각이다. 안락한 내 집은 곧 서울의 아파트를 의미하며, 아이를 위한 투자를 대치동 과외를, 안전한 노후 생활은 골프나 치러 다니며 젊은 시절의 치열함을 보상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안락한 내 집은 시골 저 어딘가 자연을 벗 삼으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어도 된다. 낡은 집이면 고생하더라도 조금 고쳐서 나만의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볼 수 있다. 아이를 위한 투자는 고액 과외나 학원을 뺑뺑이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소통하며 깊은 대화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안전한 노후 생활은 젊은 시절의 나의 정신과 육체가 탄탄할 때 비로소 늙음을 긍정하며 오로지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이다.

그러면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돈이 줄어들지 않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리 많은 돈을 써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에 대한 집착은 다 우리의 부풀려진 상상이자 신화이다. 돈이면 다 될 거라는 신화. 경제적 자유를 얻으면 행복하리라는 상상. 정작 경제적 자유를 얻고 나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사람은 드물다. 그저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라는 산 너머의 무지개를 쫓는다.



​​​

모두 각자 태어난 성질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세상은 천편일률적인 가치와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당연히 부대낄 수밖에 없다.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세상이 정해진 기준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도 삶에는 굉장한 에너지가 든다. 그래서 필경사 바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굶어 죽었다. 하물며 정해진 제도권에 이탈해 다른 궤도로 살아가는데 훨씬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사학과를 들어간다고 했을 때 안된다며 주위의 어른은 만류했다. 어른의 반대가 의아했다. 그는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를 가야 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예정돼 있는 사학과에 입학했고 정작 내가 원하는 회사에 취직할 때 전공에 구애받은 적이 없다.

인도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주위의 친구들은 나를 말렸다. 위험한 곳에 제 발로 뛰어드는 사람으로 여겼다. 101일 간 인도 여행은 누구도 하지 못한 경험을 내게 주었다. 인도를 다녀온 이후 어떤 여행도 두렵지 않았고, 인도에서 붙은 여행의 근육이 가끔씩 내 삶 속 예상치 못한 곳에서 힘이 되어주었다.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돈을 모아야 하니 부모님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 줄어든 출퇴근 시간에 1시간이라도 더 자고 책 한 줄을 더 읽었다. 일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더 많아졌다. 부모와 분리된 뒤 자유와 책임에 대해 한 발짝 다가섰다. 나를 먹이고 입히는 일에 신중해졌다.

지금 사는 집을 알아볼 때 북향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절대 가지 말라며 절레절레했다. 부동산 앱에 올라온 집 사진을 보여주니 친구들은 허위 매물이 아니냐며 의심했다. 현재 나는 오전이 되면 눈이 너무 부셔서 잠이 깨고야마는 그 집에 산다. 회사가 걸어서 이십 분이 걸리지 않고, 주변에 공원과 꽃 시장이 있어 쾌적하다. 월세 대비 집의 평수가 넓어 소파를 놓아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먹고 마셨다.



​​

세상과 다른 궤도로 살아가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 용기를 내어 실천하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얻는다. 모험한 자만 얻을 수 있는 특권. 자기 이해, 자기 신뢰, 자기 확신 같은 것.

세상 누구도 당신보다 당신을 알지 못한다. 오로지 당신만이 당신의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죽은 물고기처럼 강물에 휩쓸리는 게 아닌 강을 거스르더라도 내가 갈 곳을 정확히 아는 물고기가 되자.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 남들을 따라갈 걸, 하며 무리에서 이탈할 것을 후회할 수도 있다. 또는 주변에 바로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어 외로울 수도 있다. ​


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보면 당신과 같은 물고기들이 있다. 당신처럼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그들은 반짝거리는 비늘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어느새 당신도 독특한 무늬의 아름다운 비늘이 자신의 등짝에 새겨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세상을 거스르고 얻은 용기의 대가로 이루어진 비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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