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하게 내성적인 사람이다.
누가 mbti를 물어보면 I, I, I, I로 답할 정도로. I외 다른 항목은 중간치라 모르겠는데, I만큼은 너무 극단적으로 I이다.
나는 어렸을 때 반에서 가장 목소리 작은 아이, 조용한 아이로 통했다. 회사에 다닐 때도 '나 저 사람 목소리 한 번도 못 들어봤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다. 낯선 사람들과의 약속이 생기면 너무 긴장이 되다가 혹 취소가 되면 괜히 안심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면(예를 들어 새 학기, 아르바이트, 직장) 1, 2주 넘게 밥을 잘 못 먹을 정도로 예민해져서, 20대 때는 다이어트를 굳이 하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살이 빠졌다. (이른바 맘고생 다이어트. 또르르)
내가 태어나서 나보다 정도가 심한 사람을 본 적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성격이고 또 하나는 비염이다.
얼마 전 이비인후과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가을 초입이었다. 모두 심한 코막힘 증상이 생겨 간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의 콧속을 들여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이쿠. 아유.
심하네.
이 쪽 보이시죠? 지금 이 쪽이 완전히 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코가 막히겠죠?
어머님이 혹시 비염 있으신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료 본 나에게는 학을 떼셨다.
지금 3명 중에 어머님이 제일 심하세요. 여기 보세요, 여기.
나는 평생을 비염과 함께 살았고, 비염이 있는 한 창조론을 믿지 않는다는 주장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 따위로 창조한 거면 양심 뒤졌지.)
어릴 때 언니가 고등학교 올라갈 적, 그러니까 3월 초입에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언니는 휴지로 연신 코를 풀다가 급 화를 내면서 '3월인데 자꾸 콧물이 나와서 이미지 관리를 못하겠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약간 충격을 받았다. 나는 만성비염이라 항상 그런 이미지로 사는데...?
이미지만 문제가 아니라 비염은 나의 학업성취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수업 중에 콧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 지금 휴지를 쓰면 남한테 피해가 될까,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까? 이상할까? 수 십 번씩 고민하고 코를 푸느라 강의 내용이 도저히 들어오질 않는다. 게다가 심하게 코가 막혀서 머리가 아픈 날이면 혼자 공부할 때도 방해가 된다. 알레르기 때문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면 재채기도 심하게 한다. 그런 내 비극적인 사연을 들은 친구는 나에게 '온도계'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비염 때문에 일상생활에 제한도 많이 생긴다. 나는 수영과 마사지를 좋아하는데, 일반 물에서 수영하면 비염이 축농증으로 진화하기 때문에 수영도 하기 어렵다. 마사지를 예약해 놓았다가도 비염이 도지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취소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긴다. 자꾸 재채기를 하거나 콧물이 나오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사지도 받지 못하는 제약이 생긴다.
어쨌든 비염이나 성격이나 같다. 성격은 내 인생의 결핍이었고, 답답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끈이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면 늘 힘이 들고,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려워 인맥도 줄어든다. 누군가와 친해질 기회가 생길 때 기대가 되지만 '말할 때 어색하면 어떡하지? 할 말이 안 생기면 어떡하지?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아예 초장부터 포기해 버린 적도 있다.
당연히 그런 성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나도 속으로는 자유롭고 싶었다. 다들 사람들이랑 자유롭게 교류하고,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기고, 집순이가 아니라 놀러 다니길 좋아하는 성격이면 너무 재밌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게 스스로도 답답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결국 나는 인생 대부분의 시절을 그렇게 살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했다.
그러다 나는 글을 쓰면서 자유를 얻었다. 나는 글을 쓴다. 사실은 웹소설인데, 내가 봐도 내가 쓴 무언가가 소설이나 작품이라고 하긴 가당치 않기 때문에 그냥 글이라고 칭하겠다. 어쨌건 글 속에서 나는 많은 걸 할 수 있었다. 나처럼 틀에 박히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다 못해 새로운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람에게 소설은 내가 세상으로 나아가며 화해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어 주었다.
최근에 만약 내가 다른 사람하고 성격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꿀 것인가?라고 자문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글 때문이었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무조건 이런 성격 때문이다. 아마 내가 밝고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나는 사람들이랑 나다니느라 아마 글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거니까.
나는 글을 쓰는 내가 좋다.
한 때 죽는 게 사는 거다.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아이 키우며 느끼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 하루도 벗어날 날이 없다 생각하니 인생 전체가 암담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날은 인생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매일의 걱정과 이 전에 일의 기억들이 악몽처럼 나를 옭아맸다. 큰 문제가 생기는 날은 그 걱정을 하고, 문제가 없는 날도 이 전 기억들에 사로잡혀 있자니, 걱정이 생기는 날도, 걱정할 것이 없는 날도 결국 나는 같은 무게의 고통을 지고 있는 것이었다.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언제나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동일했다. 하루하루 걱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 고통을 죽어서 끝내는 것이 어쩌면 절대적으로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다 글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 글은 완벽한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한 번 이야기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정신이 팔려서,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던 고민과 걱정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글은 완전한 내 세상이었고, 나는 절대자의 지위를 누렸다. 전개와 구성을 끈질기게 생각할수록 나는 그 속에서 자유로웠다.
내가 자유로워진다고 해서 모든 걸 다 하진 못한다. 소설도 개연성이나 장르라는 것이 있으니.
하지만 나는 그저 현실에서 못하는, 그때 못했던 말들을 해 본다.
고마워.
미안해.
그때 안녕하고 밝게 인사하고 싶었어.
말 걸고 싶었어.
도와주고 싶었어.
화해하고 싶었어.
친해지고 싶었어.
오랫동안 말 하지 못했는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현실에서 못해서 한이 되었던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