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슬픔"에 대하여
에니어그램의 7이 가리키는 것
-
피암시는 가능성에 이끌리는 것이다.
가능성에 이끌려 보고 느끼는 것들은 모두 상상이다.
상상은 모든 가능성을 제한 없이 탐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상상은 또다시 많은 아이디어와 느낌, 감정,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느낌이나 감정은 정말 나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들을 상상이 가져다줬다니, 찬란하고 화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있는 그대로가 흑백이라면 상상은 다채로운 총천연색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읽었고, 우리를 둘러싼 흐름을 읽었고, 그것의 의미는 어떤 것이고, 우리는 어떤 과정 속에 있는 것이고..' 라는 자기 인식, 그리고 그는 슬프고 고독하고 황홀하고. 절망을 하고 다시 구원을 받고.. 그것이 그녀를 구원할 것이고, 모든 것이 증명될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주문을 걸듯 중계한다. 그것은 곧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참 찬란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그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 살아있는 느낌은, 꺼져서는 안 되는 그를 살리는 불이다.
넘쳐흐르는 직감과 감정에 어찌할 바 모르는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비극을 노래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쾌가 있다.
-
있는 그대로는 고통이나 어둠이 아니지만 그것을 추월해 지나간다는 개념이 있을 때에는 고통과 어둠이 될 수 있다. 고통과 어둠을 보지 않기 위해 그는 가능성에 이끌리고 자기 예언을 한다.
있는 그대로가 고통과 어둠이라면, 당연하게도 가능성은 쾌와 행복이 된다.
그에게는
-비극을 노래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달콤하다.
-있는 그대로에 발맞춰 가는 것이 비극을 노래하는 것보다 훨씬 괴롭다.
그는 너무나 빠르고, 앞서 있고, 타인들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없던 것을 있게 만들어 보여준다.
그가 느끼는 정서가 무엇이든 그는 결과적으로 '마법적인 사람'이다.
에니어그램은 그의 정서가 아니라, 바로 이 부분, 마법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그를 본다.
-
상상이라고 하면 어디로 데이트를 가면 좋을까, 저 직업을 가지면 어떨까, 세상이 종말 한다면 어떨까, 같은 '가정법'을 떠올리기 쉽지만, 에니어그램에서는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혼동하는 것을 모두 상상이라고 한다.
에니어그램의 7이 가리키는 것은, 있는 그대로에 머무는 장의 세계와 멀어진 이들이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가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그리고 7유형은 그 가상의 세계에 아주 빨리 도달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의도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형(形)이 있기 전에 기(氣)가 있다. 형인 우리는, 우리를 있을 수 있게 한 기를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에니어그램은 기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