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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사 Jun 03. 2022

누가 회피하고 있을까?

에니어그램 고착에서 벗어나기?


누가 회피하고 있을까?


가령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착을 직시하기를 회피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맞아요. 다들 그렇죠. 공감해요!

    나도 회피해온 것을 반성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문장이 깔끔하지 못하군요.

    그 이야기의 출처가 어딘가요?

    직시할 수 있다면 고착이 아니니까요.

    정말 누구나 그런가? 일단 나는 직시함.

    하나마나한 소리 치우고 현실을 살아.

    그쪽이야말로 생각으로 도망치는 것 같은데?

    배움은 그런 복잡한 말이 아니라 실천에 있는 거야.

    이미 다 아는 이야기 지겨울 뿐.

    (회피하지 않게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고착과 회피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은 왜? 라며 슬픔에 빠진다.)

    (듣지 않고 있음)   

    (자리를 뜸.)  


답은 위 반응들 모두가 회피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옳고, 현명하고, 편하고, 자연스럽고, 최선인 반응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회피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다.


사람은 고착을 보지 않기 위해 회피하지만, 그 회피도 그의 고착에 의해 만들어진다.

회피 때문에 고착을 직시하기는커녕 자신이 고착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지만, 그의 회피 반응 안에 그의 고착이 녹아 있다. 


'A라는 회피 반응이면 0고착(0유형)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고착과 반응을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사람의 다면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그러한 매칭을 떠올리고 있다면 그것 역시 회피다.)


고착은 70억 인구 모두에게 있다.

고착은 우리의 기질, 성격, 지능, 가치관, 취향, 신분, 처한 환경, 문화, 인간관계의 역동 안에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고착을 보기 위해서는 이 역동을 살피면 되는 것이지만 그 시도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기질, 성격, 지능, 가치관, 취향, 신분, 처한 환경, 문화, 인간관계의 역동에 의해 생성된 '나는 어떻다', '세상은 어떻다'라는 관념을 볼뿐, 역동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무수한 관념들을 우리는 실제 현실이라고 체감하고 있기 때문에 그 관념을 떼 버리기가 너무나 어렵다.

바로 이 관념들에 몰두하고 그 관념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사는 것이 모두 자기 유형대로 사는 것이고,

유형대로 사는 것은 회피이고, 회피를 하기 때문에 고착을 직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착에 붙들려 산다고 해서 현실에서 몹쓸 사람인 것은 아니다.


고착의 굴레 안에 있으면서 유형도 모르고 고착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도 사람은 업적을 남기고 사랑을 주고받는다.


오히려 그 고착 때문에 더 많은 좋은 일들을 하기도 한다.(그런 부분을 의식 수준으로 설명하는 입장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고착은 우리 각자의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고착에 붙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과 행위에도 고착이 있다.

고착을 우리에게서 떼어내 버릴 나쁜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비록 고착이 부정적인 작용을 할지라도) 차라리 떼어낼 수 없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착을 나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없애려고 할 것이고, 노력의 결과로 없앴다는 착각에 빠져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의식수준표에 기대어 거기에 묘사되는 건강한 모습이 나에게 발현되고 있다고 안심했다면 나의 고착은 그 지점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고착에 대해 생각하고 살아갈 것이라면 고착을 직시하는 것이 끝나지 않을 과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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