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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이 병이라면 청승은 죄다(감성과 청승 2편-해부)

감성과 청승, 언어의 정치학 그리고 글쓰기

by 퇴B



이 글은 감성과 청승에 관한 더 자세한 해부입니다(브런치북에 엮이질 않을 확장판)


가벼운 마음으로 1편 정의를(짧음!) 보고 오시면 좋습니다


https://brunch.co.kr/@976ee4e6ad3d4d7/56







만약 다정이 병이라면, 청승은 죄다.

타인을 자신의 감정 속으로 반드시 몰아넣고,

타인의 동정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품은 채,

기꺼이 낮은 곳에 서서 자신을 ‘방치’하잖는가.


말하자면,

억지 눈물을 곁들여 타인을 섭동시키겠다는 폭력적 노출.

청승은 타자를 ‘감정의 재료로 삼는’ 적극적 조작을 내포한다.


즉, 감성은 세계와 공명하려는 의지이고,

청승은 세계를 죄책의 공범으로 끌어들이려는 의지.


한나 아렌트적으로 다시 말해보자면,

여기서 말하는 '청승'은 아렌트가 가장 경계했던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폭력과 맞닿아 있다.

​'감성'이 타인의 고유성, 즉 '다원성(Plurality)'을 인정하며 세계와 '공명'하려는 '공적(Public)' 태도라면,

​'청승'은 '나의 사적인 감정(슬픔, 결핍)'을 공적 영역으로 끌고 나와, 타인을 "나의 감정"이라는 단 하나의 틀에 가두고 '죄책감의 공범'으로 끌어들이려는 '반(反)정치적 행위'이다.

​이것은 타인의 자유로운 '행위(Action)'를 마비시키고, '동정'이라는 감정으로 모두를 '동일화'하려는 가장 혐오스러운 형태의 '지배 의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죄인들이 자주 애용하는 도구가 바로 글인데,

문학적인 엉너리 안에서 스스로를 가엾게 이미 진단해 버리고 독자에게 '동정'하거나 '무능감'에 괴로워할 선택지밖에 두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다


• ​'감성'의 글: "나는 이런 세계를 봤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계와 공명하려는 의지')


• ​'청승'의 글: "나는 이렇게 가엾다. 당신은 이제 나를 동정해야만 한다." ('죄책의 공범으로 끌어들이려는 의지')



'나'의 고통을 '사유'의 재료로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는 가엾다'는 '판결'을 내려버린 진단서를 독자에게 들이미는 것.

​독자는 그 '진단서' 앞에서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다.


• ​'동정'한다: 그 '진단'에 동의하고, "아, 당신은 정말 가엾군요"라고 말하며 작가의 '죄(청승)'에 '공범'이 된다.


• ​'무능감'에 괴로워한다: 그 '진단'에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글이 이미 '완결된 슬픔'의 형태라 내가 끼어들(공감할) 틈이 없다.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네"라며 '무능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어느 쪽이든, 독자는 '감성'의 글에서처럼 "그럴 수도 있구나"라며 자유롭게 '사유'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그래서야 되겠나"('동정'이든 '무능감'이든)라는 '감정적 부채'를 강요당한다.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마빡에 새기고 모든 글쟁이는 각성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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