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긁어내는 일에 대하여
요철 (凹凸)
‘凹凸’.
이 한자가 처음 내게 상형문자라는 게 어떤 건지,
왜 그것이 그림에 가까운 언어인지를 가르쳐준 단어였다.
그날 이후 나는 한자 한 자를
금고 비밀번호를 맞추듯 바라보게 됐다.
마침내 뜻의 문을 열고 나면,
그 안에는 해석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글을 이해하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와 내 안의 이미지가
어딘가에서 맞닿지 않으면,
이해라는 금고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사람이 글을 읽다 전율하는 순간이란,
오랫동안 긁히지 않던 마음의 한 지점을
딱 맞는 문장이 긁어주는 찰나 아닐까.
그때 우리는 문장을 ‘읽는다기보다’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내게 모르는 단어를 새로 알게 되는 기쁨은
질 좋은 효자손을 얻은 기분과 비슷하다.
그 단어로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내는 순간,
언어가 비로소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
가려움, 절대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