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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동탁을 죽여도 초선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by 퇴B



‘dime’은 10센트짜리 동전이다.
그래서일까, 이 단어엔 ‘싸구려’나 ‘흔하다’는 뉘앙스가 묻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부턴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를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아마 그 작고 반짝이는 동전의 표면에서,
‘빛난다’는 뜻이 미인에 대한 은유로 번져나간 걸 것이다.

십 점 만점의 십 점, a perfect ten.
하지만 동시에 고작 10센트짜리.
인간의 이해방식이란 참 묘하다.
가치(의미)를 말하려다가 결국 값을 매긴다.
사람을 ‘십 점’이라 부르면서도
그 숫자가 너무 완벽하면 불안해진다.
그 불안은 감탄이 아니라 결핍의 그림자다.
누군가의 완벽함이 나의 부족함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그래봤자 십 센트”라며
웃음으로 시시덕거린다.
욕망과 폄하가 동시에 입안에 맴도는 그 맛,
그게 인간이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특히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향할 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공공연하게 여성의 외모에 순위를 매기고(십 점),
그를 ‘여신’으로 추대한다.
하지만 그 완벽한 대상이 세월의 흔적을 보이거나(주름),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선택을 하면(연애),
기다렸다는 듯이 ‘한물갔다’ 거나 ‘거품’이라며
‘십 센트짜리’ 딱지를 붙인다.
‘저런 여자는 돈만 밝힐 것’이라며 손쉽게 폄하하는 익명의 목소리들은,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아야 하는 서글픈 욕망의 발로다.

물론 남성이라고 이 추태에서 마냥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압도적으로 잘생긴 미남을 향해
‘분명 바람둥이일 것’이라거나
‘얼굴값 하느라 속이 비었을 것’이라며
미리 선을 긋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빛난다’는 가치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결핍이 드러나기에,
어떻게든 ‘싸구려’라는 꼬리표를 달아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다.

작은 동전 하나에 이렇게 모순된 의미가 달라붙은 건,
인간이 욕망과 타협하는 방식 때문이다.
저 여자를 갖고 싶지만,
나는 안 되겠지 —라고 이미 스스로에게 선을 긋는다.
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말한다.
“난 원래 싸구려엔 관심 없어.”
사실은 닿을 수 없으니까, 손가락질이라도 해야 견딜 수 있다.
손이 닿지 않는 만큼 말이 세진다.
그렇게 우리는 욕망 앞에서 늘 체면을 세우고,
결핍을 품위로 포장한다.

십 센트짜리 반짝임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dime’은 십 센트의 가치가 아닌,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값비싼 빛을 뜻한다는 걸.
다만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초라함이 드러나니까
애써 헐값을 매겨 버리는 거다.
싸구려라고 말해야 덜 초라하니까.

‘빛난다’는 말이 ‘싸구려 같다’와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
그건 꽤나 인간적인 역설이다.
욕망을 부정하면서 욕망을 유지하는,
그 미묘한 감정의 진폭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타협하는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dime’은 참 정직한 단어다.
가치와 결핍, 욕망과 부정이 동시에 눌어붙은,
르상티망의 표면.

그리고 그 르상티망의 현실은
언제나 여성 쪽에 더 가혹했다.
욕망과 조롱의 권력관계 속에서
‘값을 매길 수 있는 사람’과 ‘값이 매겨지는 사람’의 간극은
여전히 깊고, 불평등하다.
아무래도 구매력이 더 있는 쪽이,
후려치기도 더 많이 하기 때문이겠지.

이쯤 되면 전파력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역사 깊은 판데믹 아닐까 싶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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