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포자를 위한 다시 시작하는 한국사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들 간의 권력 다툼이었습니다. 두 사건을 겪는 과정에서 정치 질서가 흔들렸고 왕권은 약화되었죠. 이 상황에서 인종의 뒤를 이어 제18대 왕인 의종이 즉위합니다. 의종은 문벌들 사이에서 약화된 왕권을 다시 세우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보수 문벌들의 반발에 부딪혀 의욕을 상실하였습니다. 의종은 정치에 관심을 잃었고, 한뢰, 김돈중 등 자신에게 아첨하는 문신들과 향락에 빠집니다. 그리고 허구헌날 놀러를 다니죠. 그러다가 놀러간 곳 중 하나가 바로 보현원이란 곳입니다.
왕이 놀고 먹고 있으니 정치 권력은 문벌들이 독차지 하게 되었습니다. 권력의 독점은 부패를 낳았죠. 자, 여기서 잠시 고려의 관직유형에 대해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고려의 관직 유형은 크게 문반과 무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반은 광종 때부터 실시된 과거시험을 거치거나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광종 때 시행된 과거에는 무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과는 어떻게 뽑앗을까요? 고려에서는 신체적 능력이 뛰어날 경우 군인으로 발탁하였고, 이들 중 지략이 있거나 무공이 높고, 공을 세운 사람일 경우 상장군으로 승진을 하였습니다. 무반이 되려면 힘꾀나 쓰는 사람이 되다보니 글공부하는 양반자제들 보다는 미천한 신분이 많이 발탁됩니다. 이렇다보니 문반과 무반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법적으로, 현실적으로 동등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문반이 우대되고 무반은 천시되었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감찬이나, 윤관 등은 모두 문반입니다. 무술과 병법을 연마하고 전쟁과 방어 등의 군사적 활동을 담당하는 무반이 군사지휘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차별을 뜻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사회풍조가 이런 차별을 만들어낸 것이죠. 하급군인들의 불만은 더 컸습니다. 고려의 군인들은 군복무를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군인전이라는 땅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문반(문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군인들에게 지급할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하급군인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하였고, 성곽수리 등 각종 공사에 동원되거나 왕과 문벌의 향략생활을 호위하는 데 차출었죠. 그렇게 무신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1170년 무신들의 불만을 알고 있던 의종은 보현원으로 놀러 가던 중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무술시합)를 엽니다. 잘하는 군인에게 상을 내려 무신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의종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황이 전개됩니다. 오병수박희에 대장군 이소응과 또다른 무인이 무술을 겨룹니다. 그러다가 이소응이 수박희에서 패해 계단위로 올라오니, 한뢰가 갑자기 일어나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때려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왕과 여러 문신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심지어 패한 이소응을 꾸짖기까지 합니다. 이에 분개한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이 정변을 일으켜 한뢰 등의 문신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정중부 등의 무신들은 곧바로 개경의 왕궁을 점령하고 이어 의종을 폐위시키고 거제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리고 의종의 동생을 왕위에 앉혔죠. 그가 바로 제19대 왕인 명종입니다. 이 무신정권은 제19대 명종 때부터 제24대 원종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무신정권기(1170~1270)에는 왕이 있었지만 무신 집권자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좌우하게 됩니다.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당시 자신들의 회의기구였던 중방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권력의 밖에 있던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무신 중의 우두머리가 자주 바뀌었죠. 이 와중에 천민 출신이 최고 권력자가 나타납니다. 바로 노비의 아들 이의민입니다.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수박희에 능해 의종의 눈에 들어 일개군인에서 별장(장교)으로 승진하였다가 무신정변 때 문신들을 제거하는데 활약하면서 장군으로 승진하였습니다. 무신정변이 일어난지 3년째 되던 해에 김보당이 무신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김보당 일행은 유배되어 있던 의종을 구출해왔습니다. 정중부 등은 의종을 제거하고자 이의민을 보냈습니다. 김보당의 일행은 진압하면서 이의민은 자신을 발탁해준 의종을 잔혹한 방법으로 시해하였고, 이 공으로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김보당의 반란이 진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 역시 이의민이 선봉에 서서 진압하였고, 이 공으로 고려 무반의 최고봉인 상장군으로 임명됩니다. 노비 출신으로 최고의 권력자로 등극한 것이죠.
그러던 중 경대승이 정중부를 기습해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경대승은 스스로도 무신이었지만 무신들의 부정부패에 대해 분개한 인물로 왕정을 다시 복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신들이 그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국정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농단하던 정중부를 가만두고 볼 수 없었고 행동에 나섰던 것이죠. 정중부의 휘하에서 출세길을 달려오던 이의민은 경대승이 권력을 장악하자 몸을 사리며 사태를 관망합니다. 그리고 만일의 기습에 대비하여 자신의 집에 최정예 병력을 배치시켰죠. 경대승 역 도방을 설치하여 병력을 한 곳에 모아두면서 두 세력의 긴장감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경대승이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권력은 이의민으로 집중되었고, 명종의 명에 의해 고려 재상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의민은 권력을 장악한 후 부정과 비리를 일삼고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의 집과 땅을 배앗았습니다. 자신의 은인을 져버리고 시해한 인물이니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의민만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족과 아들들 역시 흉폭하고 간교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이지영은 특히 행패가 심했다고 합니다. 1196년 이지영은 다른 무신인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비둘기를 빼앗긴 최충수는 불만을 품고 자신의 형인 최충헌과 모의하여 이의민 부자를 제거하기로 합니다. 1196년 4월 9일 이의민의 일정과 동선을 파악한 최씨 형제는 자신의 별장에서 나오던 이의민을 습격하여 제거하였고, 그 아들들도 모두 제거하였습니다.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은 이전 권력자들이 했던 것처럼 곧바로 최고 관직에 오르지 않고 국왕의 왕명을 전달하는 승선과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어사대 자리를 맡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권력을 조금씩 차지하였습니다.
이의민을 제거한 후 최충헌은 약 20여 년 간 무신 최고 우두머리로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 기간 동안 명종, 신종, 희종, 고종의 4명의 왕을 교체하고 옹립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휘둘렀죠. 최충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핵심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 그 장관을 교정별감이라 한 후 스스로 교정별감이 됩니다. 최충헌의 막강한 권력은 무력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힘있고 용맹한자들 대부분이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의 부하가 됩니다. 이에 최충헌은 이 무인들을 도방에 소속시키면서 도방의 기능과 규모를 확대시킵니다. 이들이 최충헌의 사병으로 활동하면서 결국 관군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중국 대륙에서 몽골이 흥기하여 금나라를 정벌합니다. 금나라의 힘이 약화되자 금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족이 다시 일어나 대항하다가 오히려 몽골에게 쫓기게 되었죠. 약 1만 명으로 추정되는 거란군이 몽골군을 피하다가 고려로 침입해 왔습니다. 당시는 최충헌이 집권하던 시기였는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도방의 확대로 인해 약화된 관군으로는 거란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거란군은 2년간 고려의 북쪽 경계지역 휘젓고 다니면서 고려와 수차례 전투를 치르죠. 그러던 중 거란군은 고려 동북쪽에 있는 강동성을 점령하고 이곳으로 결집합니다. 추격하던 몽골군과 지키려던 고려는 강동성에서 난생 처음 서로를 마주합니다. 고려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고립작전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결국 거란군이 굶주림에 항복하면서 성문을 열고 나오면서 고려는 거란군을 격퇴하였습니다(강동성 전투, 1218-1219).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와 몽골은 서로 형제로 여기는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몽골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가져갔습니다.
1219년 최고권력자 최충헌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이어 받습니다. 최우는 자신의 집에 정방을 설치하 인사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던 중 1225년 몽골에서 저고여라는 사신을 보내옵니다. 그런데 이 저고여가 몽골로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를 빌미로 몽골은 고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231년 몽골은 저고여의 피살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략합니다. 몽골 장수 살리타가 이끈 몽골군 고려군을 가볍게 물리치고 고려 영토 깊숙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고려의 북쪽 경계 지역(북계)을 점령한 후 개경 근교에 주둔하였죠. 결국 최우는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면서 1231년 12월 화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살리타는 북계의 여러 성을 관리하기 위해 다루가치를 설치한 후 이듬해 1월에 철수하였습니다.
몽골이 철수한 후 몽골의 요구는더욱 노골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막대한 공물과 인질 요구가 지속되었고 정치적 간섭도 심화되었으며, 심지어 군사를 징발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분노한 최우는 1232년 6월 살리타가 설치했던 다루가치들을 죽인 후 7월에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해 몽골에 대한 항쟁을 시작합니다. 이에 몽골은 같은해 8월 다시 고려에 침입해왔습니다. 또다시 고려에 온 몽골 장수 살리타는 최우에게 개경으로 돌아올 것과 몽골에 조공을 요구하였죠. 그러나 최우는 강화도에서 항전의 뜻을 알립니다. 살리타는 텅빈 개경을 지나 계속해서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고려 전국토를 유린하며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몽골군은 12월 처인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처인성으로 몽골군이 오자 주변지역 사람들이 모두 처인성으로 피난하였는데, 이 중에 승려 김윤후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군민과 몽골군이 일전을 벌이던 중 살리타가 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게됩니다. 살리타는 일개장수가 아닌 몽골군 전체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총사령관이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몽골군은 철수하게 됩니다.
몽골은 2차 침입 이후에도 또다시 여섯 번이 넘게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 고려의 정부가 강화도에 있다보니, 본토에 있는 고려의 정규군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습니다. 관군이 점점 사라지면서 치안이 불안해지고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났습니다. 최우는 자신의 사병을 이용해 매일 밤 순회하며 도적을 검거하게 했는데, 이를 야별초라 합니다. 치안을 담당하던 야별초의 수가 늘어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이어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자들로 구성된 신의군을 더하여 삼별초를 조직합니다. 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최우는 권력을 승계한 후 30년 간의 집권 생활에 마침표를 찍으며 1248년 자신의 아들 최항에게 권력을넘겼습니다. 최항 역시 강화도에서 몽골에 항전을 지속하면서 최고 집권자로서 권력을 유지하다가, 집권한지 8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최의에게 권력 넘겨주었죠. 최충헌의 시작된 권력의 승계가 4대까지 이어진 것이죠. 그러나 최의는 집권 후 자신의 측근만 총애하면서 다른 무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하며 정치적으로 소외시킵니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김준, 임연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최의가 제거 되면서 4대 60여 년간 이어져 온 최씨정권이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권력의 핵심이었던 최씨 집안이 사라지면서 최고 집정자의 자리르 두고 치열한 경쟁이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서 무신들의 힘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죠.
한편, 아직 최씨 정권이 지속되고 있을 무렵 계속되는 전쟁에 염증을 느낀 고종은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을 끝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이 계속해 항전을 주장하여 실행이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김준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고종은 다시 몽골과 강화를 추진하여 1259년 고종은 태자(훗날 원종)를 몽골에 보내 강화를 추진하였습니다.
태자(원종)가 몽골에 갔을 무렵 몽골 조정에서도 권력 계승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대칸 몽케가 사망하자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가 각각 대칸으로 즉위하면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쿠빌라이와 아릭부테 중 어느 쪽으로 가서 강화를 맺느냐가 향후 고려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을 알고 있던 태자(원종)은 그냥 고려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우연한 것인지, 의도된 것인지 모르지만 태자는 돌아가는 길에 쿠빌라이를 만나게 됩니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태자가 자신에게 와서 항복한다고 생각하여 크게 기뻐하면서, 고려 국왕의 지위와 체제를 유지할 것을 약속합니다. 태자는 몽골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고려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몽골에서 쿠빌라이가 아릭부케를 물리치고 대칸이 되면서 고려는 그 지위와 정치체제, 풍속 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태자가 몽골로 떠난 사이 고종이 사망합니다. 태자의 즉위가 불안한 상황 전개된것이죠. 쿠데타를 주도한 김준이 권력을 장악하여 태자가 돌아오기 전에 태자의 동생(고종의 차남)을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몽골의 지지를 얻은 원종이 귀국하여 다음 국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원종은 곧바로 개경으로 환도를 추진하였으나, 여전히 권력은 무신 집권자에게 있었으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원종이 맺고 온 강화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몽골은 고려가 아직까지 몽골에 저항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개경으로 환도를 독촉하면서 공물과 인질 등의 요구를 강화하였습니다. 이에 양국의 관계는 다시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고, 몽골은 당시 집권자였던 김준을 몽골로 보내라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준은 1268년 고려에 와있던 몽골의 사신을 죽이고 나아가 원종을 폐위하려 합니다. 그러나 무신들 사이의 경쟁 속에 있던터라, 임연에게 제거 되었죠. 김준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임연 역시 개경으로 환도에 반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종이 지속적으로 개경으로 돌아가고자 서두르니, 원종을 폐위해버리고 새 왕을 추대했던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몽골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원종을 복위시켰습니다. 원종은 복위 된 후 몽골로 가서 폐위 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군사 요청을 하였습니다. 임연을 중심으로 한 무신세력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죠. 임연이 죽고 뒤를 이은 임유무가 개경 환도에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제거 되면서 몽골과 강화 후 약 10여 년이 지나 1270년에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습니다. 최씨 정권의 무력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강하게 반발하며 끝까지 몽골과 결사항전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배중손, 김통정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진도,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겨가며 몽골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여몽연합군에 의해 제주도에서 진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