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세기 고려의 건국과 성장

역포자를 위한 다시 시작하는 한국사

by 부마니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고려의 건국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는 점차 주변 호족을 흡수하며 세력권을 넓혀갑니다. 송악(현재 개성)지역의 호족이었던 왕건은 후고구려가 세력을 뻗어 오자 궁예의 부하로 들어갔습니다. 후고구려는 신라 영토의 북부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게 되죠. 광평성을 설치하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던 궁예는 어느 순간부터 미륵신앙에 심취하여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면서 전제 정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독심술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신하에게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몰아 처형하는 등의 폭정을 일삼았죠. 궁예는 호족들의 신망을 잃게 되어 결국 쫓겨납니다. 호족들은 새로운 왕으로 왕건을 추대하였습니다. 왕건은 당시 후백제와 경쟁 속에서 배후를 쳐 전라도 나주지역을 점령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호족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이었죠. 918년 왕건은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고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합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면서 신라에 대해 화친정책으로 전환하였죠. 한편 고려가 건국된 이후 북방에서 거란족이 흥기 합니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발해가 막지 못하고 멸망하게 되었죠. 발해의 마지막 왕자인 대광현은 발해의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내려옵니다. 왕건은 같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던 발해를 형제국가로 삼아 대광현과 유민들을 수용하고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후 고려는 형제국가를 멸망시킨 국가로 적대시하게 됩니다.


후삼국 통일 과정

앞서 후백제는 신라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공격하여 왕위 계승에도 관여하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에 반해 고려는 신라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지녔으니 신라의 입장에서 고려의 자주 도움을 요청했을 겁니다. 927년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왕위에 올렸을 때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해 출정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던 후백제군과 공산(현재 대구)에서 격돌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등이 전사하고 왕건 역시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로 크게 패했습니다. 후백제는 승기를 잡은 뒤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930년 고창(현재 안동)으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왕건은 고창 지역의 호족의 지원을 받아 후백제군을 격퇴하였고, 이 고창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백제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고창전투 이후 고려와 후백제는 일진일퇴를 거듭합니다. 그러던 중 후백제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견훤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넷째 아들 금강이 체격과 용모, 지략에 있어 뛰어났죠. 견훤은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합니다. 이때 첫째 아들이었던 신검이 불만을 가지고 935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검은 금강을 제거하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아주 깊숙이 가두어 둠)하고 국정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3개월가량 유폐되었던 견훤은 경비병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금산사에서 빠져나와 왕건에게로 갔습니다. 이에 왕건은 견훤을 극진히 대우하며 거처를 마련해 주었죠.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가는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은 대세가 고려에 있으니 더 이상 신라를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왕건에게 찾아가 항복합니다. 이로써 935년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죠.

한편, 견훤은 왕건에게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응한 왕건은 936년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를 공격합니다. 신검 역시 고려와 승부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섰습니다. 두나라 군대낙동강 유역의 일리천에서 마주한하였는데, 견훤이 고려군을 이끌고 나온 것을 본 후백제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일리천전투에서 고려에 대패합니다. 신검의 항복을 받은 고려는 후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초기 성장을 이끈 주요 국왕들

태조

통일 후 태조 왕건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주력하죠. 왕건은 고려를 세운 직후부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호족들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둘 때는 정도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취민유도)을 세우고 세금을 1/10로 거두게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세율을 낮춰 준 것이죠. 전쟁 중에 재산을 잃거나 재해로 농사에 실패하는 등 생계에 어려움을 겪게 된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흑창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곡식을 대여해 주고 갚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왕권을 안정적으로 다지기 위해 지배층인 호족들에 대해서도 강경책과 회유책을 사용합니다. 먼저 호족들의 딸과 결혼하는 혼인정책을 실시하여 호족들을 왕실의 가족으로 삼습니다. 호족을 통합하면서도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 공을 세운 호족에게는 왕건의 성씨를 하사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호족을 견제하고자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실시합니다. 사심관 제도란 중앙 정부로 옮겨 온 호족에게 자신의 출신지역을 담당하는 관리, 즉 사심관으로 임명해 출신지역에 대한 관리권을 부여한 것입니다. 출신 지역에서 민심이 흉흉하거나 반란이 일어나면 책임을 묻기 위함이었죠. 사심관으로 임명된 호족은 살아남기 위해서 출신 지역에 대해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되죠. 기인 제도란 중앙 정부로 올라오지 않고 지방에 남은 호족들이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자식을 개경에 머물게 한 것인데, 쉽게 인질제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왕건은 죽기 전 <훈요10조>를 적어 후대의 왕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10가지로 정리하여 남겨 안정적으로 고려를 통치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태조가 죽은 뒤 외척과 호족공신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집니다. 태조가 호족을 통합하려고 실시한 혼인정책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죠. 이 다툼 속에서 제2대 왕으로 혜종이, 제3대 왕으로 정종이 즉위했으나, 왕권이 그리 강하지 못했습니다.


광종

이러한 상황에서 제4대 왕으로 광종이 즉위합니다. 광종은 이전까지 유지되던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킵니다. 왕권을 강화시키려면 먼저 왕권을 견제하는 세력의 권력을 약화시켜야 하죠.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의 찾아 본래의 신분을 되찾아주었습니다. 이것은 양인의 숫자를 늘려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는 동시에 이들 노비를 재산으로 가지고 있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학적 지식과 학문에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합니다. 왕이 직접 뽑으니 왕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 뽑힌 관리들의 복색을 관등에 따라 구분하여 지배층의 위계를 정하고, 그 정점에 왕을 둠으로써 왕권을 보다 더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종의 정책에 반대하는 호족들은 무차별적으로 숙청당하면서 호족공신들의 권한은 약화된 반면 왕권은 강화되었습니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제5대 왕으로 경종이 즉위합니다. 경종은 전시과를 제정하는 등의 치적을 남기기는 했으나 국정 운영에 관심은 없고 오락과 바둑을 좋아해 심취하였다가 병세가 위독해지자 왕위를 사촌동생에게 넘깁니다.


성종

경종에게 왕위를 넘겨 받아 즉위한 제6대 왕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하면서 유교적 이념에 따른 국가를 만들어갑니다.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습니다. 또 광종 때부터 시행된 과거제를 정비하면서 유학 교육을 강화하고자 국자감을 설치하였습니다. 성종은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수용하여 중앙 정치 기구를 정비하였는데, 2성 6부의 형태로 독자적으로 운영합니다. 또 송의 제도를 받아들여 중추원과 삼사를 두었습니다.




문벌이 형성되고 난 후 고려 사회


문벌이란

고려를 세운 지배 집단인 호족은 광종 이후부터 실시된 과거제에 응시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대에 걸처 과거를 통해 관리에 등용된 후 고위 관직으로 승진하는 호족 집안이 생겼습니다. 이 집안(가문)을 문벌이라고 합니다. 이 문벌은 왕실과 혼인하거나, 문벌끼리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합니다. 정치적으로 과거를 치지 않고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라는 제도를 통해 관료가 되기도 하죠. 고려시대에 형성된 대표적인 문벌은 경원 이씨, 해주 최씨, 경주 김씨, 강릉 김씨, 청주 이씨, 남평 문씨, 파평 윤씨, 철원 최씨 등이 있습니다. 이중 경원 이씨 가문은 11대 왕인 문종부터 17대 왕인 인종까지 연이어 왕비를 배출한 가문으로 약 80여 년간 권력을 누린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습니다.


이자겸의 난

경원 이씨 가문의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이자겸입니다. 이자겸은 자신의 둘째 딸이 제16대 왕예종의 왕비로 들어가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왕의 장인이 되면서 권력을 손에 쥐기 시작하죠. 그런데 중 문경태후(이자겸의 둘째 딸)이 아들을 낳게 되자 권력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습니다. 예종의 뒤를 이어 자신의 외손자인 제17대 왕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입니다. 이자겸은 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이자겸의 권세가 왕을 능가하기 시작하자, 인종은 이를 견제하고자 지방 출신의 인재를 대거 발탁하였습니다. 이 신진 관료들은 왕을 보좌하는 세력이 되면서 문벌을 비판하면 대립점에 서게 되었죠. 이들을 측근세력이라합니다. 인종은 자신의 측근세력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자겸은 당시 최고 무장이었던 척준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1126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흉흉해졌습니다. 이자겸이 권력을 차지한 이후 중국에서 금나라가 강성해집니다. 금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려가 금나라를 섬길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자겸은 권력을 유지하고자 이를 수용하였죠. 그러던 중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내분이 일어납니다. 인종은 이틈을 이용해 척준경을 회유하면서 이자겸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죠. 이렇게 이자겸의 난은 끝이납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이 제거된 후 인종은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윤언이, 정지상, 묘청 등 소수의 측근세력을 적극 기용하였죠. 특히 묘청은 서경 출신의 승려였는데,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금나라를 정벌하고 황제 칭호와 연호를 사용하자고 주장하였죠. 인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묘청을 책임자로 하여 서경 천도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서경에 궁궐을 새로인 짓고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이에 김부식 등의 개경세력은 서경 천도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였습니다. 개경 세력의 반대에도 서경 천도가 추진되었으나, 서경에 짓고 있던 새 궁궐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나는 등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풍수지리를 내세웠던 서경 천도 주장이 급속이 힘을 잃어갔습니다. 이틈을 이용해 김부식 등이 인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서경 천도 운동 계획이 백지화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묘청은 1135년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고 하며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관군을 내어주며 진압명령을 내렸습니다. 김부식이 이끈 관군은 1년여 만에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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