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세기 남북국 시대, 현재의 과거판

역포자를 위한 다시 시작하는 한국사

by 부마니

1. 남북국시대의 의미와 신라의 시대구분


유득공, 남북국 시대를 주장하다

남북국 시대란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북쪽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남쪽의 통일신라가 함께 공존하던 시기를 말합니다. 이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조선 후기의 인물은 유득공입니다. 유득공은 자신이 저술한 「발해고」 에서 발해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 이름하였습니다. 참고로 발해의 경우 스스로 편찬한 역사서가 없어 발해의 역사를 담은 다른 역사사를 통해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조선시대처럼 국왕의 치적 등의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698년에 세워져 926년까지 약 230여 년 간의 존속한 나라로 효율적은 제도정비와 안정된 사회체제를 구축했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신라가 통일해서 만들어진 신라만의 시대구분

고려시대에 저술된 「삼국사기」는 신라 왕들의 혈통을 기준으로 상대, 고대, 하대로 나눕니다. 박혁거세부터 성골의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까지를 상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인 태종무열이 즉위한 후 혜공왕까지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이어간 시기를 중대, 또다른 진골 출신의 왕들이 왕위에 오른 선덕왕 이후의 시기를 하대라고 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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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일 이후 신라는 발전과 쇠퇴


신라 중대, 건국 이래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안정을 누리다

먼저 통일 이후의 신라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문무왕이 676년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는 이전보다 영토가 더욱 넓어지고 인구가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들을 안정적으로 신라에 흡수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방 각지에서 반란이 지속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지방의 세력을 안정적으로 포섭하면서도 견제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습니다. 삼국통일을 달성하면서 왕권도 강해졌습니다. 문무왕의 노력으로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면서 제31대 왕신문왕통일 신라의 전성기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신문왕이 즉위한 해 왕의 장인이자 진골이었던 김흠돌이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관련되어 있던 진골 귀족을 숙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왕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 조직을 재정비 하였죠. 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 이어 녹읍을 폐지하면서 진골 귀족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또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을 가르쳐 왕에 충성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늘어난 영토를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옛 고구려 지역과 백제지역, 신라 지역에 각각 3개의 주를 설치해 전국을 9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 금성(오늘날의 경주)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점을 보완하고자 5개의 작은 수도(5소경)를 설치하였습니다. 이 5소경은 지방의 정치아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군사제도도 개편하면서 군사력을 정비하였습니다. 중앙군으로 9서당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인과 백제인도 포함하였습니다. 지방군은 앞서 살펴본 9개의 주에 1정을 설치하였는데, 북쪽 국경지대였던 한주에는 추가로 1정을 더 설치하면서 총 10정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제33대 왕성덕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성덕왕은 강화된 왕권과 안정되 정치를 기반으로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에 대핸 진골세력의 반발 점점 거세어졌고 제35대 왕경덕왕 때 녹읍을 부활시키면서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녹읍의 부활로 진골 귀족의 세력기반이 강화되면서 왕권은 점점 더 약화하게 되었고 제36대 왕혜공왕 때는 96명의 진골들이 친왕파와 반왕파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벌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혜공왕이 피살되었습니다.


신라 하대, 천년의 신라가 저물어가다

태종무열왕의 직계 자손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혜공왕이 96각간의 난을 시작으로 한 진골들 간의 다툼속에서 780년 피살되면서 신라의 정치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혜공왕이 피살되고, 진골들 간의 다툼 속에서 김양상이란 인물이 김주원과 김경신의 도움을 받아 제37대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선덕왕이 죽고 난 후 약 150여년 간 20명의 왕위 교체될 정도로 왕권이 약화되었습니다. 이 150여 년의 기간에 새로 즉위한 왕들은 왕위를 노리는 또다른 진골들을 견제하느라 국정운영을 제대로 할 수 없었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지방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졌고, 이를 틈타 지방의 유력자들(원래 귀족 또는 파견된 지방관 등)이 점차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을 호족이라고 부릅니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으면서 선덕왕 즉위에 기여했던 김주원과 김경신 사이에서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 경쟁에서 김경신이 승리하면서 제38대 원성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원성왕은 발해에 사신을 보내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외교적 안정을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또 유교 경전의 이해력을 상품, 중품, 하품으로 평가하고 이를 기반으로 관리를 등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유교적 덕목을 통한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한편, 왕위 계승에서 밀린 김주원은 지방으로 낙향하였고, 김주원의 아들이었던 김헌창은 중앙 정계에서 계속 활약하면서 822년(제41대 헌덕왕 재위시기)에는 웅천주(현재 공주) 도독으로 있었습니다. 김헌창은 계속해서 원성왕의 집안에서 왕위를 이어가는 상황을 보며,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 품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고 정하면서 신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웅주, 전주, 무주, 강주 등 여러 지역들이 김헌창의 난에 호응하여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란은 결국 진압되면서 실패하였습니다.

이렇듯 신라 하대에는 왕위를 둘러싸고 진골들 간의 치열한 정쟁이 지속되었습니다. 지방에 대한 통제는 무너졌고, 여기에 편승해 귀족들은 백성들을 수탈하였으며, 중앙정부도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하였죠. 이렇듯 곤궁해진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갔습니다. 더군다나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세력을 확장하는데 백성들의 불만을 사용하여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죠. 호족들은 스스로를 성주나 장군으로 부르며 자신의 성을 쌓고 군사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제51대 왕인 진성여왕이 즉위합니다. 진성여왕은 초기에는 백성을 위한 정치 실시합니다. 세금을 면제해주거나 효녀를 찾아 상을 주는 등 민심을 다독이고자 하였죠. 그러나 머지 않아 정치에 싫증을 느껴 측근세력을 중용하여 국정을 맡기면서 정치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 재해도 일어나 888년에는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때문에 이듬해인 889년에는 걷힌 창고가 텅비었다고 할만큼 세금이 크게 줄었죠.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했겠습니까. 그런데 진성여왕은 오히려 전국에 관리를 보내 세금 독촉을 합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사벌주(현재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키자, 전국에서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반란이 이어졌습니다. 이 중에 뒤에서 배울 견훤과 궁예도 반란에 참여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적고적이라는 무리는 금성을 위협할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 반란과 혼란을 겪은 진성여왕은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제52대 왕인 효공왕이 즉위하였습니다.

후백제의 성립: 효공왕 즉위 후에도 신라의 통제력은 회복되지 못하였고, 이를 틈타 견훤은 무진주(광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원래 견훤은 서남해안을 국경을 수비하던 장군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의 세금 독촉 이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주변의 호족을 통합하였고, 900년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하여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견훤은 우선 중국의 후당과 오월에 사신을 보내 새로운 국가가 수립했다는 것을 알리는 등 외교적 안정망을 구축하였습니다. 전라도 곡창지대 소유, 서남해안을 통한 무역 등으로 경제 기반을 확보한 후백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후백제는 신라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는데, 신라를 공격하여 수도 경주에 진출, 당시 왕이었던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족인 김부를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으로 옹립하기도 하였습니다.

후고구려의 성립: 전국 각지에서 호족들이 생겨났을 때 북원(현재 원주)에 양길이라는 인물도 호족으로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궁예는 양길의 부하로 있다가 자신의 세력을 키워 독립하였습니다. 이후 주변 호족들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궁예는 901년 송악을 수도로 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 계승의식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10세기 초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의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궁예는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 등을 점령하고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리고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면서 수도를 철원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또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습니다.




3. 남북국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발해의 흥망


발해의 건국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이 고구려 땅에 안동 도호부를 세우고 지배하면서 고구려 백성들이 대거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남아있던 고구려인들은 당의 지배에 저항하였습니다. 한편 요서 지역에는 고구려인뿐만 아니라 말갈인, 거란족 등이 여러 민족이 당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 북부지역에서 당의 지배를 받던 유목민족인 돌궐이 당에 반기를 들어 독립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에 자극을 받은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일시적으로 당의 통치가 무너지면서 고구려 유민 중 한 사람이었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 등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당에서 빠져나와 요동지역 이동하였습니다. 당나라는 곧바로 진압군대를 편성하여 반란세력을 진압하러 추격하였죠. 당의 추격군대를 천문령에 물리친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698년 진국을 세웠습니다. 진국의 지배층은 주로 대조영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세력이 차지하였고, 그 아래 말갈인 등이 피지배층이 되었습니다. 몇 번의 추격과 견제에 실패한 당나라는 결국 대조영이 세운 진국을 인정하고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진국은 발해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대조영은 당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연호를 천통이라 정하며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을 계승하며 국가를 운영하였습니다.


발해의 발전과 멸망

대조영이 죽고 제2대 왕으로 무왕이 즉위하였습니다. 시호에 무(武, 싸우다, 굳세다)를 쓸 정도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하였죠. 무왕은 주변 지역을 정복하면서 동북쪽으로 발해의 세력을 확장시킵니다. 발해의 확장에 위기를 느낀 만주 동북쪽에 살던 흑수말갈이 당과 연결을 시도하였습니다. 당나라 역시 발해의 성장을 계속해서 견제해 오던 터라 흑수말갈과 우호관계를 맺었고, 또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를 남쪽에 긴장관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에 무왕은 돌궐,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당과 신라에 대응하는 한편 732년에는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하였죠. 발해의 국력을 표현하는 동시에 '건들지 마라.'라는 선포이기도 했습니다.

무왕의 뒤를 이어 제3대 왕으로 즉위한 문왕은 시호에서 보이듯 정복과 팽창보다는 문물 발전과 사회 안정에 공을 들인 인물이었습니다. 문왕은 이전까지 당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친선을 도모하며 우호적 관계로 전환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의 발전된 문물을 수용하였죠. 그렇지만 발해는 당의 문물을 수용하면서도 발해의 독자적 해석과 판단을 가미합니다. 대표적으로 당의 제도를 본떠 정비한 3성 6부 체제는 겉모양은 당의 제도와 같습니다만, 명칭과 운영면에서는 발해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문왕은 수도를 여러 번 옮기면서 왕권을 다지고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문왕이 죽고 한 후 여러 왕들이 등장하여 통치하였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대체적으로 재위기간이 짧아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제10대 왕으로 선왕즉위하면서 정치적 안정과 더불어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선왕은 흑수말갈을 복속시켜 당과 연결을 차단하고 연해주부터 요동지역까지를 차지하는 등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이에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왕 이후 내분에 휩싸였고, 결국 10세기 전반인 926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였습니다.


발해의 통치체제 정비

앞서 문왕 때 당나라의 문화를 주도적으로, 독자적으로 수용하였다고 했는데,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수용해 똑같은 3성 6부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명칭과 운영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발해는 국가 운영을 위해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개의 성을 설치하였습니다. 그중 정당성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죠. 그리고 이 정당성에 좌사정과 우사정을 설치하고, 6개의 부를 소속시켜 국가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6개를 3개씩 나누어 좌사정, 우사정에 배치시켰죠. 그리고 충, 인, 의, 지, 예, 신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6부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등 중국과 다른 독자적 운영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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