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기 삼국의 시대 ②

역사포기자를 위한 다시 시작하는 한국사

by 부마니

1. 고구려의 시대,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

소수림왕의 안정화 정책으로 고구려는 빠르게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소수림왕의 체제정비는 제19대 왕광개토왕의 정복 사업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광개토왕은 즉위후 전방위적인 팽창을 전개하였습니다. 먼저 고국원왕을 죽인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백제 수도 한성을 포위하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한강 이북까지 점령하면서 영토를 넓혔습니다. 얼마 후 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왕이었던 내물마립간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광개토왕은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쳤고, 도망가는 왜군을 추격하다 낙동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금관가야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한편, 서북쪽으로 후연을 물리쳐 오랫동안 숙원 사업이었던 요동 지역을 마침내 확보하였습니다. 동북쪽으로 거란과 동부여를 복속시키면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영토 확장의 성과를 바탕으로 광개토왕은 독자적 천하관을 가지고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광개토왕의 정복 사업은 제20대 왕장수왕에게 이어졌고, 장수왕 때 고구려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우선 장수왕은 즉위 후 중국 북쪽을 통일한 북위에게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어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동시에 중국 남쪽의 동진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이 남북으로 나뉘어진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외교적 안정을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를 반대하는 귀족 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공동으로 대응하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세력이 상대적으로 강해졌습니다. 백제의 왕들은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죠. 그러던 중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실시하자 위기감을 느낀 백제는 제20대 왕비유왕은 433년 신라와 나제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제21대 왕개로왕은 즉위 후 고구려 장수왕이 계속하여 백제를 압박하자,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며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개로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고 고구려군을 막았으나 당시 최강국인 고구려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신라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고구려군사에게 잡혀 처형당했습니다. 제22대의 왕 문주왕은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 혼란에 빠진 백제를 재정비하였습니다. 제23대 왕동성왕은 고구려와 전투에서 패배, 수도 천도 등으로 약화된 왕권을 다시 높이고자 웅진 지역의 토착세력을 등용하고 나제동맹을 강화하였습니다.

신라: 내물마립간이 재위하고 있을 때 가야와 연결된 왜가 신라를 침입해 왔습니다. 당시 신라는 이제 갓 중앙 집권화를 향해 발돋움 했을 때였습니다.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왜군을 막기에 벅찼던 내물마립간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때 광개토왕은 5만의 군사를 주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 있습니다. 바로 호우명그릇입니다.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릇 뒷면에 광개토왕과 관련된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였고 제19대 왕눌지마립간은 때마침 백제에서 나제동맹을 체결하자는 제의가 오자, 433년 나제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제21대 왕소지마립간나제동맹을 강화하면서 고구려 공세에 대응하였습니다.




2. 신라의 시대, 6세기


고구려, 내분이 일어나다

장수왕이 죽은 후 고구려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불이 일어납니다. 내부적으로 혼란의 상황에 진행되고 있을 때 외부적으로도 중국의 정세가 변하면서 고구려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대내외의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고구려는 중국 지역에 대한 경계 태세를 강화하였고, 한반도 남부에 대한 압박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틈타 백제와 신라는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공격해 왔고, 고구려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면서 결국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습니다.


신라,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다

눌지마립간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제22대 왕지증왕은 사실 즉위할 때는 지증마립간이었습니다. 지증마립간은 즉위한지 4년째에 국호를 신라로, 왕의 호칭을 왕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마립간으로 즉위하여 왕으로 생을 마감한, 마지막 마립간이었죠. 지증왕은 우경을 전국에 보급하고, 농업 노동력 확보를 위해 순장을 금지시켰습니다. 원활한 상업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시장을 개설하고 이 시장을 관리감독하는 동시전을 설치하였습니다. 한편, 영토 확장에도 심혈을 기울여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을 복속하였습니다. 제23대 왕법흥왕은 즉위후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또 율령을 반포하여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관리의 등급을 매긴 17관등제를 마련하여 서열화 시킴으로써 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습니다. 나아가 신라를 사상적을 통일하고자 불교 수용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측근세력이었던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수용하고 공인하였습니다. 이로써 내물마립간부터 지속해온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의 모습을 확립하였습니다. 지증왕과 법흥왕의 왕권 강화책들은 제24대 왕진흥왕 때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진흥왕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팽창에 나섭니다. 이 팽창 과정이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단양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북한산비, 창녕비, 황초령비, 마운령비)입니다. 이 비석들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새로이 정복한 지역에 세운 비석들이죠. 진흥왕은 고구려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를 북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백제를 기습해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았습니다. 이로써 나제동맹이 깨지고 백제와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백제 성왕과 관산성의 대결에서 진흥왕이 승리하였습니다. 한강 전체를 장악함으로서 백제나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또 청소년 집단이었던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죠.


백제, 중흥을 꾀하다.

제25대 왕무령왕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지방에 22담로(행정구역명칭)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하도록 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시켰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에도 경서에 능통한 오경박사를 일본에 보내 유교를 전파하였습니다. 무령왕 때 왕권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제26대 왕성왕으로 이어졌습니다. 성왕은 즉위 후 왕권을 강화시키고, 수로를 이용하기 편하며, 평야를 가지고 있어 경제적으로 유리한 사비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또 부여 계승 의식을 표방하며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죠. 중앙에 22부를 설치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 운영을 강화하였습니다. 중국 남조와 지속적으로 우호관계를 형성하고, 일본(왜)에도 불경과 유학 등은 전파하면서 중흥을 도모하던 성왕은 고구려가 중국의 압박을 받고, 더구나 왕위 계승 분쟁으로 혼란한 틈을 이용해 신라의 진흥왕과 함께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습니다. 한강 하류지역을 백제가 차지하였으나, 진흥황이 나제동맹을 깨고 기습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아 갔습니다. 분노한 성왕은 가야,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죠. 그러나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면서 백제 중흥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3. 삼국지의 시대가 끝나다, 7세기


고구려,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다

고수전쟁: 왕위 계승 분쟁으로 국내 정치가 어수선했던 고구려에서는 590년 고구려 제26대 왕영양왕이 즉위하였습니다. 영양왕 즉위 직전인 589년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남조와 북조를 모두 통일하였습니다. 중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을 때 고구려는 남북의 분열을 이용하여 국제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이젠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수나라가 고구려와 경쟁하고 있던 돌궐을 약화시키면서 강대국으로 면모를 드러내면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칠 것을 강요합니다. 이에 영양왕은 598년 수나라의 요서지방을 선제 공격하면서 당시 동북아시아의 최강 국가였던 고구려의 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수나라의 문제가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가 11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다시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수 양제는 113만의 군사 중 30만명을 뽑아 별동대를 만들고 장수 우중문에 주어 고구려 수도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우중문의 별동대를 맞이한 것은 을지문덕이었습니다. 을지문덕은 거짓항복을 반복하면서 별동대를 고구려 깊숙이 유인하였고, 결국 살수(청천강)에서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를 살수대첩(612)이라하죠. 결국 퇴각한 수나라는 이후 두 차례 더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고구려 공격에 국력을 소모하면서 반란이 일어나 618년에 결국 멸망하였습니다.

고당전쟁: 수나라가 망하고 이어 당나라가 건국되었습니다(618). 당나라는 건국 후 국가 재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죠. 당나라가 건국 되던해 제27대 왕영류왕이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역시 여러차례 전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응하였습니다. 그러나 양국가 간 평화의 관계는 그리 오리 가지 못했습니다. 당나라에 태종이 즉위하면서 두 나라의 외교 관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태종은 즉위 후 고구려 정복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며 고구려를 위협하였습니다. 영류왕은 당의 침략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죠. 그러면서도 최악의 전쟁만큼은 피하고자 당과 표면적인 우호관계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연개소문이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제28대 왕보장왕을 옹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대막리지에 올라 국정을 장악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은 당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가진 인물로, 정권 장악 후 당에 대한 외교는 강경 노선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이 당 태종을 자극하였고,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은 요동성와 백암성 등을 함락시키며 몰려왔지만 645년 안시성에서 격퇴되면서 결국 퇴각하였습니다.


백제, 재기를 노렸으나 역사의 뒤안길로..

고구려가 중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무렵 백제는 국제 정세를 지켜보면서 중국과 고구려 두 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습니다.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즉위 후 신라로 계속하여 진출하여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신라는 백제의 공세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죠.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아 간 한강 유역을 반환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원병 요청을 포기하고 바로 당으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에서 건져줄 것을 요청합니다. 고구려 공략에 실패했던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나당동맹,648). 나당동맹에 따라 결성된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먼저 공격하였습니다. 당의 군대와 신라의 군대가 양쪽에 공격한 것입니다. 이때 백제의 장군 계백이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을 막아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660년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신라, 삼국을 통일하다

한강유역을 모두 차지한 신라는 고구려가 언제 다시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중국과 전쟁에 돌입하자,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당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쳤으며, 수나라에는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가 한창 중국과 전쟁일 때 백제가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해왔습니다. 신라 제27대 왕선덕여왕은 진골출신의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한강 유역 반환 요구에 협상은 결렬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 전쟁이 끝나면서 고구려의 압박도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제28대 왕진덕여왕 때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과 나당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합니다. 진덕여왕이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진골출신이자 나당동맹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한 김춘추가 신라 제29대 왕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태종무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먼저 공격,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를 격파하고 사비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무열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30대 왕문무왕이 즉위하였습니다. 문무왕 즉위 후 얼마지나지 않아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지배층 사이에 권력을 둘러싼 다툼이 생겨 내부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인 것을 기회로 삼고,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총공세를 가하였습니다. 결국 668년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도 멸망하였습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백제 수도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수도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망하지 않은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한 후 신라왕을 계림대도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당나라와 결전을 준비하였고, 675년 매소성에서 이근행이 이끈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쳐 승기를 잡았습니다. 이어 676년 기벌포에서 설인귀가 이끈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당나를 몰아내고 마침내 삼국 통일을 달성하였습니다.

keyword
이전 05화1~4세기 삼국의 시대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