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tipode Jan 03. 2023

화생설화

[West]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화생설화



'저만 고생하는 거지.'

누군가 지나가며 던진 말.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보통의 속도로 착실하게 주어진 단계를 넘어왔다. 아무도 정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가늠하고 있는 인생의 과제들. 크나큰 부침 없이 그것들을 얼추 통과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정감과 자부심이 없지 않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난 실패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이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


햇빛 비추는 작은 마을의 오두막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다. 바람이 일어 이마에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스친다. 방 한가운데 놓인 책상 위 종이가 펄럭인다. 수없이 많은 끄적임들. 지우개가 남긴 흔적. 활짝 열려있는 노트북. 글을 쓰는 중이었나 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어떤 이의 삶을 재현하거나 창조하는 일. 더는 나와 닮은 인물을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또다시 펜을 드는 일. 모자란 재능에도 버리지 못하는 애정의 대상. 다시 한번 구애하러 몸을 일으키려는데 거슬리는 소음이 들린다. 마치 고개나 들라는 듯한 소리에 눈을 뜬다. 겨우 앉은 덕분에 허무한 꿈에라도 기댈 수 있던 2호선 안의 풍경이 쏟아져 내린다.


“너는 웃는 얼굴이 참 예쁘구나.”

벌을 박제하는 과학시간이었다. 작은 꿀벌의 몸집에 비해 아주 커다랗던 액자 중앙에 사체(死體)를 꽂았다. 검사를 받으러 교탁 앞으로 걸어간 난 떨리는 마음에 공연히 웃었고, 선생님은 액자에 꽂힌 벌이 아니라 그 웃음을 칭찬했다. 그날 그 수업에서 박제된 것은 벌 두 마리가 아니었다. 이렇게 웃어야 예쁜가? 이건 너무 억지스럽나? 개죽이 짤과 거울을 번갈아보면서 이게 눈웃음이겠거니, 연신 눈을 감아댔다. 한동안 나의 사진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을 앙다문 얼굴만이 담겼다. 앞이 잘 안 보여 찌푸린 것 같기도, 어딘가 심통이 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가늘게 휘어진 두 눈은 어느새 가장 익숙한 내 표정 중 하나가 되었다. 글 역시 비슷하게 내게 다가와 박제되었다.


글, 나아가 이야기에 왜 이리 집착하게 되었을지 생각하다 보면 6학년 2반 담임선생님과 재회한다. 꾹꾹 눌러쓴 글씨로 백일장에 한 편의 독후감을 제출한 이후, 그녀는 비슷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늘 나를 불렀다. 다정하게 나를 찾는 목소리와 이따금 그녀가 건네는 칭찬이 좋았다. 이제와 돌아보면 초임지에서 맡은 문예담당 교사라는 책임감에서 빚어진 인연일 거라 생각되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래서 글을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꾸만 다른 언어로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의 영역은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감동하고 공감하고 그것의 여운을 조금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게 전부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확신이 되어감에도 멈추지 못했다. ‘꿈’이라고 부를만한 마음을 가졌다. 허구든 실제든 세상에 닿을 이유가 있는 이야기라면 그것을 써내려가 사람의 마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 마음은 진짜였을까. 이루고 싶은 게 분명하다면 혹은 분명했다면, 온전히 좇지 못하고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의 내게 물음을 던진다. 나는 나로서 살고 있나. 무슨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지. 정말 이대로 괜찮은 삶인 걸까. 확신은 낮아지고 의심이 겨울 그림자처럼 점점 더 길게 늘어진다. 그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든 ‘쟤는 글을 쓰니까’라는 다름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이것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닐까. ’글 쓰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선언한 후 가장 좋았던 건 예민함이랄까 청승맞음이랄까 그 기묘한 특질을 보호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몇 차례 반복적인 안정을 느꼈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아 여태 꿈을 꾸는 척 있는 게 아닐지 두렵다.


의심과 불안, 자기반성과 부끄러운 고백 사이에서 잠시 벗어나려 또 한 편의 이야기를 펼친다. 거대한 운명과 필연적인 결함, 사랑을 비롯한 여느 감정, 다양한 형상의 악(惡)과 비극. 이 모든 것과 각자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존재들이 살아있는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의 일원이 되어 마음과 시간을 나누다 서사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강하게 내리꽂는 울림을 느낀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곳과 다른, 수만 가지 이야기가 이룩한 세계에서 만난 이들. 그들은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돌아 나오기 아쉽고 애타는 진심을 느끼며 재차 생각한다. 내 꿈이 거짓은 아니었을 거라고. 그들의 재생 그리고 어떤 마음의 탄생이야말로 내 안에서 피워내고 싶은 절정이라는 걸 서둘러, 반갑게, 긍정한다. 내 안에 솟아나는 이 감정을 붙잡으며 살아보려 하는데 어떻게 궤도를 수정하며 끝없이 나아갈 수 있을까.


전부터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글 쓰는 삶의 성패는 삶이 끝날 때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나이 칠십을 먹고 그럴듯한 소설 하나 쓸지 누가 아느냐고. 불행인 것은 여전히 글을 못 쓴다는 사실이고, 다행인 것은 아직 글을 못 쓰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꿈을 위하여 그동안 일상의 균형을 유지시킨 무게추에서 어디를 빼내야 할지 조심스럽다. 겁이 나지만 다시 문장을 완성한다.


이런 마음으로 꿈꾸는 사람들을 오래도록 응원하고 있다. 누군가 무모하다고 할지라도 꿈이 있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아니라고’ ‘분명 환하게 반짝일 날이 올 거라고’ 말하곤 한다. 나 역시 꼭 이루고 싶은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이기에 ‘라라랜드’의 Audition(The Fools Who Dream)을 수차례 다시 들으며 마음을 다잡은 밤도 많다.


사실 전과 다르게 무서움이 커지고 있다. 꿈꾸는 이를 향해 무조건적인 응원을 건네기 앞서 잠깐의 머뭇거림이 생겼다. 정말 우리가 맞는 걸까, 언제까지 이래도 괜찮은 걸까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곁을 내어주는 인물들의 기다림이 있기에 이 도전이 계속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래도 말야. 현실 위에서 오롯이 서야 하는 세상에서. 이제는 꿈꾸는 삶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고, 여느 사람들처럼 우선 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할 때가 아닐까?’ 하는 물음이 자꾸 입 안에 꿈틀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꿈꾸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모두가 위인이 될 수는 없잖아.”

영화 ‘쏘울’에 나온 이 대사가 우리를 향하게 하고 싶진 않다. 여전히 분투하고 있는 친구의 얘기로도 듣고 싶지 않다. 나에게 글이 그렇듯, 가슴 아래 품어온 영역에서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내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그저 가능성이 있는, 혹은 있었던, 존재로만 우리가 기록되지 않기를.


인간은 모두 삼신할매의 사랑을 받아 꽃을 피워 소중한 존재로서 한 사람 한 사람 태어났다는 화생설화에 따르면, 우리는 참 아리땁고 유일무이한 존재들임이 분명한데. 아리땁고 유일무이하게 살아가는 것은 왜 이리 쉽지 않은가.



Fin.

From the West.

작가의 이전글 소란한 고요의 도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