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 내가 죽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어느 맑은 날, 나비는 꽃을 찾아 분주히 날아다닙니다. 나비는 처음 앉았던 꽃의 향기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비는 많은 것들을 기억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의 매끄러운 비행과, 비가 쏟아지고 나면 어김없이 세상을 진동하는 풀 내음, 자신의 날개를 빼닮은 하얀 꽃이 가득하던 버려진 공터와, 참새를 피해 작은 화단이 있는 집의 뒤편으로 날아드는 법, 그리고 일생에 한 두 번 만날까 말까 한 완벽한 꽃들의 향기.
‘내 속에는 기억이 너무 많아.’
나비는 매일 조금씩 무게를 더해가다 어느 날 갑자기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단 한번의 살랑임도, 한 줌의 향기도 남길 수 없는 무심하고 초라한 추락. 나비는 근심에 잠겨, 부쩍 더뎌진 날개를 가다듬습니다. 어쩌면 이제는 자신도 다른 나비들 처럼, 내려앉은 꽃 송이 마다 기억 한 조각씩을 남겨두고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없이 가벼워진 몸으로 마음껏 하늘을 누빌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일까, 나비는 못내 고민합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을 다시는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면, 자주 찾던 화단으로 가는 길을 영영 잊어버리거나, 풀내음을 가득 담은 비가 내리는 날 마다 그저 불평만 늘어놓게 된다면, 어느 날에는 다른 나비들과 자신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지, 나비는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아무렇게나 흔들리던 더듬이에 바짝 힘이 들어갑니다. 두 번 다시 하늘을 날 수 없게 되더라도, 이전의 어떤 기억도 저버리지 않겠다고 나비는 끝내 다짐합니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 위로 나비가 내려앉자, 나비가 가진 기억의 무게만큼 나뭇가지가 가늘게 휘청입니다.
무심히 나뭇가지를 흔들어오는 바람, 그 사이로 익숙한 향기가 스밉니다. 어쩌면 오늘은 그날의 향기를 다시 만나게 될까.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은 나비이지만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봅니다. 나비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다시 한번 날아오릅니다. 마지막일지 모를 비행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집니다. 드넓은 공백 속 나비는 작은 점이 되어, 파란 하늘에 처연히 선명한 궤적을 그립니다.
Fin.
From the E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