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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키온니 Oct 26. 2022

39세에 승무원이 된 이유 1

3년 6개월의 기다림(팬데믹)

사실은 이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시작하게 된 글쓰기이다. 왜 39세에 입사를 하게 되었으며 나름의 고충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며 위기를 기회로 전환했는지 또 매번 그 위기의 순간에 좋은 사람들(귀인)을 통해 극복해 나갈 수 있었음의 감사함을 부족하지만 표현하고 싶었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2018년, 그해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기다렸던 퇴사를 하였고 승무원으로 일하며 알게 된 인연으로 아시아 축구협회(AFC)에서 잠시 일할 수 있었으며(이 부분도 잊지 못할 굉장한 추억이었는데 기회가 되면 자세히 기록하고 싶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아주 잠시 방황 아닌 방황도 하였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준비한 꿈의 직장에서 합격 선물을 받았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 드디어 마음의 평온이 찾아온 거다.


최대 3개월 안에는 입사할 거라는 생각으로 5달째 기다림을 이어가던 중, 회사로 부터 메일을 받았다. 언제 비자 발급이 될지 알 수 없으니 상황이 바뀌면 알려주겠다 그때까지 네가 입사를 희망하길 원한다는 애매한 내용이었다. 면접 인터뷰 당시 항공기 관련업에 종사하는 경우 보안법이 강화되어 비자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릴 거라는 안내를 받기는 하였지만 기다리라는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메일의 내용에 30명 가까운 합격생들은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승무원 준비생 또는 현직을 위한 카페가 있는데 보통 그 카페를 통해 우리는 채팅방을 만들어 정보를 공유한다. 합격생 채팅방에서는 몇 달 동안 입사 후 즐겁고 행복한 고민의 이야기로 주를 이루었는데 갑자기 위기가 닥친 거다. 당시 지방에 거주하던 나는 모임을 가질 수 없었지만 수도권에 거주 중인 대기자들은 즉시 만남을 조성해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발 빠르게 역할 분담하여 회사와 컨택하기 시작했다. 회사 측에서는 합격 통보를 하였으나 계약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네덜란드 정부에서 승인해 주지 않는 비자에 대해서는 본인들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 이야기하며 진전 없는 1년이 그냥 지나갔다. 그러던 중 2020년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이제껏 없던 상황에 세상은 혼돈의 카오스였으며 전 세계는 발목이 묶인 채 가까운 이들을 잃어가는대도 속수무책이었다. 다행히 나는 집 앞 영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다렸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언제 입사의 소식을 접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마저 쉽사리 구하지 못한 대기자들 중에는 입사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 역시 조급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자기만의 인생 시간표를 설계하는데 입사 후 딱 2년만 근무할 수 있는 KLM 네덜란드 항공사였기에 근무기간 전, 후 나름의 계획들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는 것과 아무런 수확 없는 시간의 흐름이 야속했다.


나는 꼭 입사하고 싶었다. 단지 어느 항공사의 합격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나는 남들에 비해 배경도 학벌도 나이도 어느 하나 내세울 것 없었지만 내 모습을 알아봐 준 회사에 헌신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만큼 좋지 않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에게 노력하면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눈앞에 손을 뻗으면 닿을 그곳을 다가가지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다시 내려놓는 심정으로 이 상황이 다 지나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다시 좋아질 거라는 긍정의 주문을 외웠다.


사실상 입사 취소를 알리는 메일과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기다리고 있으니 잊지 말아 달라는 메일을 드문 드문 주고받던 중 대기자 중 한 분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오랜 시간 대기했음에도 모두가 나처럼 단 한 번이라도 파란 유니폼을 입고 싶은 마음은 같았던 거다. K양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손 놓고 있을 때 혼자서 구청과 경찰서에 수백 번을 전화하고 직접 찾아가 읍소했다고 한다. 아무런 소득이 없는 가운데 지인의 조언으로 국민 신문고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고 마침내 주 네덜란드 한국 대사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회신을 받으며 다시 꺼져가는 희망에 불씨를 피울 수 있었다.


솔직히 처음 이런 상황을 듣고도 KLM 네덜란드항공 측에 대한 내 마음은 불신 상태였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무방비 상태에 놓인 우리였으며 정확하게 다시 우리를 채용해준다는 메시지도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네덜란드 정부가 승인해 주지 않는 채용 건에 관해 회사는 아무런 힘도 없었을 테고 이야기했다시피 계약서도 쓰지 않은 상태의 우리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 사항도 없었다.

주 네덜란드 한국 대사관에서 도움의 손길을 준다고 한 시점은 코로나가 가장 기승을 부리던 2020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세계 뉴스와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여행업을 비롯한 항공업계는 살얼음판이었다. 더욱이 KLM 네덜란드 항공도 적자의 직격탄을 피해 가지 못하고 인원감축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내 맘 속 불신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입사를 하고 싶었다. 이유는 하나 하루라도 파란 하늘 위 파란 유니폼 입은 나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결혼 준비와 학원 경영을 맡으며 새로운 일들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공부하며 나름의 보람을 느꼈다. 아쉽고 속상하지만 그것은 잠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음속 작은 희망은 꺼트리지 않은 채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건강해야 했다. 30대였지만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 상황들이 지나가면 언제가 되더라도 회사는 반드시 우리를 부를 거라고 믿었다.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은 다시 의도적으로 덮어두고 무모할지라도 매일 아침 나는 'KLM 네덜란드항공에 입사한다'를 주문처럼 외치며 집 앞동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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