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대본이 있어요? 없어요?

부제: "초 치지 마!"와 "저거 다 콘셉트야!" 그 어디쯤

by 박희영

주말 저녁, 거실 소파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TV를 본다.

요즘 한창 인기라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 속 주인공이 엉뚱한 실수를 연발하자, 거실은 순식간에 난리가 난다.

“아유, 쟤는 어떡하니! 칠칠맞기는!”

“아니, 저기서 저걸 왜 떨어뜨려! 진짜 답답하다!”

“그래도 순해 보이고 꾸밈없고 솔직해서 난 좋은데?”

주인공의 다음 행동에 온 가족이 제 일처럼 몰입해 감정을 쏟아내는 그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직업병'이 도지는 한마디를 툭 던지고 말았다.


“저거 다 대본이야. 저거 다 콘셉트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순간, 뜨겁던 거실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다.

“야! 너 때문에 흥 다 깼잖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왜 초를 쳐? 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날 나는 그렇게, -사실은 매우 자주- 가족들의 행복한 몰입을 방해한 '프로 스포일러'가 되어 구석으로 찌그러진다.



방송작가로 일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저거 진짜예요? 저거 대본 있는 거예요?"

"관찰 예능은 대본 없죠? 그냥 카메라만 켜두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은 방송, 특히 리얼리티나 관찰 예능은 대본이 없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 '날것'의 느낌, 그 예측 불가능한 ‘우연’이 주는 재미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단호하게 그 환상을 깬다면,

"네. 모든 방송에는 대본이 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다.


물론 그 '대본'이 드라마처럼 배우의 숨소리, 눈 깜빡임까지 지시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멘트'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런 대본도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본 없는 방송'에도, 사실은 뼈대보다 더 촘촘한 '설계도'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성안' 혹은 '큐시트'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그 회차에서 무엇을 찍을지(기획), 출연자들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흐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각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를 보여줄지(콘셉트)가 철저하게 기획되어 있다.

방송은 우연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다. 주인공이 엉뚱한 실수를 하는 '콘셉트'이라면, 제작진들은 그 실수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을 치밀하게 설계한다. 시청자들은 '우연히 벌어진 실수'에 웃지만, 우리는 '계획대로 터진 실수'에 안도한다.


다시 말하자면 방송은 결국 ‘리얼을 연출하는 예술’이다.

있는 그대로를 찍는 것 같지만, 그 ‘있는 그대로’를 만들기 위해 수십 명이 기획하고, 조율하고, 연습한다.

대본은 늘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은 언제나 예측 불가다. 그래서 방송은 살아 있고, 그래서 재밌다.


처음 작가 일을 시작할 때는 콘셉트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해 시청자보다 더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이제는 반응이 더 있거나 없음의 차이이지 구성상의 예측은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베테랑 중에 베테랑이 된 구성작가가 새롭게 초심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작가로 돌아간 것이 바로 음악방송이었다.

그곳의 '대본'은 내가 지금까지 다뤄온 '대본'과는 문법 자체가 달랐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내가 '상황'과 '콘셉트'를 설계하며 리얼을 연출했다면, 음악방송의 대본은 '음악' 그 자체였다.

음악방송 작가의 큐시트는 멘트가 아니라 '노래'로 채워진다. 우리는 그날의 감정선을 '구성'하기 위해 음악을 '선곡'한다. 이것이 바로 음악방송의 '대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푹푹 찌는 한여름, 에어컨 바람 아래 지쳐있는 시청자들을 위해 '여름 바캉스 송'을 큐시트 첫머리에 올린다. '이 노래 듣고 당장 떠나세요!' 하고 시청자들의 마음을 부추기는 것이다. 쌀쌀한 가을밤, 괜히 마음이 허전할 땐 '별 보러 가자' 같은 노래를 배치해 낭만적인 흐름을 만든다.


시청자들은 그저 좋은 노래가 연달아 나온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제작진이 치밀하게 설계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셈이다. 이 셋 리스트(Set List)야말로 그날 방송의 완벽한 기승전결이자 스토리텔링이다.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경력을 쌓은 베테랑 작가였지만, 이 거대한 '음악'이라는 대본 앞에서 나는 다시 신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론대로라면 음악을 구성하면 되는 것인데, 말처럼 쉽지가 않았기에. 가수 섭외도 어려운데, 딱 맞는 노래를 찾아내는 능력까지 갖춰야 하니 말이다.


내가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최고의 감정(음악)을 '찾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배열해야 시청자의 마음을 정확히 두드릴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했다.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 2025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지원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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