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밑에 피디가 있었다

부제 :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

by 박희영

화장실 거울 앞이었다.
손을 씻고 고개를 드는데, 옆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고개를 돌려보니—그 피디였다. 바로, 선배가 말하던 “음악프로그램을 싫어한다던 젊은 피디” 중 한 명.

순간, 나는 잠깐 삐걱거렸지만 이내 사회생활용 웃음을 장착하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이런 기분인가?’


그 피디는 환하게 웃으며 자꾸만 말을 붙였다.
“요즘 프로그램 잘 보고 있어요.”


나는 물에 젖은 손을 허겁지겁 털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상냥한 표정과는 달리 속으로는 중얼거렸다.
‘싫어한다더니 왜 이렇게 친절해?’


그런데 그 피디가, 휴지를 접으며 말했다.
“이번에 나온 밴드요. 진짜 좋아하는 밴드예요.”



순간,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진짜요? 그 팀 아세요?”


“그럼요. 공연도 봤어요. 아, 혹시 다음 달 라인업은 누구예요?”



그 말에 나는 완전히 멈췄다.

‘뭐라고? 이 밴드를 안다고? '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혹시 인디밴드 좋아해요?”

“좋아하죠. 그 팀, 제 플레이리스트에 전곡 다 있어요.”


순간, 내 머릿속에서 번쩍했다.
‘이 피디, 음악 좀 아는 피디다!’


그 짧은 몇 마디 사이에, 나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

"다음 달에 녹화구경 와요. 피디로 오면 더 좋고 호호. 아님 우리 밥 한 번 먹을까요?"


“좋아요. ”

그렇게,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우리의 첫 약속이 잡혔다.

며칠 뒤, 방송국 근처 조용한 카페 창가. 테이블 위엔 아메리카노를 마주하고 우리가 있었다.

그녀는 초록색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햇살이 비칠 때마다 작은 원형 펜던트가 반짝였다.



“진짜 음악 좋아하시네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린 그렇게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가수, 공연, 예전 음악방송 얘기를 이어갔다.

조심스럽게,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프로그램도 좀 한다 하지, 왜 다들 싫어해요~하하"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그 프로 너무 하고 싶은데 안 시켜주던데요?"


'뭐라고?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고? 무려 하고 싶은 의욕까지 있다고?'


그 순간, 모든 게 연결됐다.

‘싫어해서가 아니었구나. 기회가 없었던 거였구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해요. 우리 프로 피디로 와요~ 오기만 하면 섭외, 홍보, 현장은 제가 다 할게요.
정말 잘 만들 수 있어요. 정말 잘해줄게요."


이 대사, 내가 피디한테 하는 말이 맞나? 이성을 꼬실 때(?)나 할법한 말을 나는 그 상큼한 초록 귀걸이의 그녀에게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흥분된 듯 말했다.
"저도 사실, 음악프로그램 만드는 게 로망이에요.”


“진짜요?”


“네. 근데… 안 시켜줘요.


"그럼 일단 다음 달 녹화부터 손 번쩍 들어요. 직접 하겠다고~”



이유를 알고 보니, 선배피디는 후배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말을 안 한 거였고,

본인이 음악프로를 좋아하지 않으니, 후배들도 그렇지 않을까 지레짐작했었다.

후배 피디들은 선배가 하는 프로그램을 뺏을(?)순 없으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 거였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오해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그 한 잔의 커피가 우리 프로그램의 운명을 바꿀 줄은 그때는 몰랐다.

며칠 후, 나는 선배 피디에게 달려갔다.



“선배님, 그 피디 있잖아요. 음악프로 하는 게 꿈이라던데?"


“거짓말, 젊은 피디들 음악 프로 안 좋아해! ”

“아니요, 정말 좋아해요. 정말하고 싶대”


“너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다 물어봤지~"


그리고 몇 달 뒤, 그 피디가 진짜 우리 팀으로 왔다.
초록 귀걸이를 하고, 그날과 똑같은 미소로 문을 열며 왔을 때 나는 속으로 웃었다.


“드디어 구했네… 피디님을.”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 2025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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