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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글 Oct 14. 2022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파급력

이전 직장은 평균 근속기간이 긴 곳이었다. 그래서 '고인 물'도 많은 곳이었다. 현 직장은 이직률이 높은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직장은 공공기관이었고 현 직장은 공공기관이 아니다. 직업적 안정성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게다가 현 직장은 이전 직장에 비해 박사급 연구원보다 석사급 연구원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석사급 연구원들은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본인의 전공을 살리기 위해 이직이나 퇴사를 결정하는 경우가 박사급 연구원에 비해 빈번한 편이다. 그래서 현 직장은 이전 직장보다 평균 근속기간이 짧고 이직률이 높은 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함께 일하는 연구원이 앞뒤 맥락 없이 찾아와서 처음 하는 말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면 불길한 예감이 밀려온다. 나에게 미칠 영향이 약한 내용이라면, '드릴 말씀'의 내용은 본인의 개인사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얘기다. 예를 들어, 부모님 중 한 분이 편찮으셔서 연차를 연달아 붙여서 장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등의 사전 업무협의를 요구로 하는 일을 논의하러 왔을 수 있다. 애초에 '드릴 말씀'이라는 것은 본인의 사정으로 인해 조직에 양해를 구할 일이 있다는 뜻이 깔려 있기 때문에 이 정도는 예상 가능하다. 해당 연구원이 평소에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바탕으로 상사와의 협의를 통해서 업무를 조정해주는 방향을 모색해볼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답이 안 나오는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그 '드릴 말씀'이라는 것이 퇴사 의향인 경우이다. 보통 많은 경우 '드릴 말씀'이 있다고 각 잡고 예고 없이 찾아왔을 때는 퇴사 의향을 고할 때가 많았다. 이 경우도 다양하게 나뉜다. 본인의 퇴사 의향을 밝히고, 언제쯤 퇴사 시점을 잡는 게 좋을지 '논의'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나마 나은 경우이다. 그러면 업무 인수인계 시점 등을 고려하여 언제쯤 퇴사하는 게 좋을지 조직 차원에서 논의하여 함께 결정할 여지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잘 마무리하고 나간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보다 별로인 경우는 한 달의 기한도 주지 않고 나는 언제 퇴사하고 싶다고 밝히는 경우이다. 일단 회사에서 직원을 권고사직할 때에도 통보 후 한 달의 기한을 주는 바, 역으로 직원이 퇴사를 할 때도 회사에 한 달 전에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는 불문율이 있는데 이걸 지키지 않는 사람이 꽤 많다. 사유는 갑자기 이직할 새 직장에서 출근 명령이 떨어졌다든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든가,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어 졌다든가 등 다양하다. 최악은 퇴사일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다음, 남은 연차를 알뜰하게 다 써먹겠으니 인수인계를 할 수 있는 날은 딱 이 날 하루밖에 안 된다고 '통보'를 하는 경우이다. 꾸며낸 이야기냐고? 실제로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 사람이 MZ세대에 대해 편견을 갖게 만든 사람, 바로 그 장본인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의 긴장감과 파급력을 아는 나는, 내 상사에게 이런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정말로 논의할 내용이 있을 때는 "ㅇㅇㅇ 건에 대해 논의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논의 주제를 밝힌다. 무슨 내용이지 서두에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못하고 '드릴 말씀'이라고 두리뭉실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야 하는데 짐작이 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이 퇴사든 장기휴가든 휴직이든 간에 본인의 개인적 상황을 양해해 달라는 내용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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