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꾸역꾸역 연구원에서 사람을 부리는 방법

단기계약직부터 시작한 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상급자는 물론 동료들의 '평가'가 굉장히 중요했다. 평가가 나쁘면 재계약이 안 되기 때문에 언제 어느 순간이든지 '일잘러'의 이미지를 풍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니, '일잘러'까지는 못 되어도 최소한 사생활을 반납하고 야근은 기본으로 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떤 업무가 주어지든 간에 주어진 기한 내에 반드시 제출하려고 노력했고 거의 대부분 더 시간을 달라는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임무를 완수해냈다.

자, 이건 꼬꼬마 계약직 연구원일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무기계약직 연구원을 거쳐서 정규직 연구원이 될 때까지 연차가 쌓여도 이 이미지가 굳어지자, 고약한 사람들의 집합소인 꾸역꾸역 연구원에서는 이런 나를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닌, '남들이 기피하는 업무를 시켜도 군소리 없이, 반발 없이 묵묵히 일할 사람'으로 취급해 버렸다.  그래서 꾸역꾸역 연구원의 의사결정자들은 불평불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업무를 배당하지 않고 나처럼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고 군말 없는 사람에게 기피 업무를 주면서도 하등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루는 나에게 남들이 모두 기피하는, 연구원의 설립목적과 하등 관계없는 연구과제를 하라고 시키는 상사가 하도 어이없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이전에도 꾸역꾸역 분야와는 관계가 별로 없는 연구를 훌륭히 해내서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있으니까 또다시 꾸역꾸역과 관계없는 분야의 연구를 시키는 거죠?" 그러니까 나 혼자 스스로 자화자찬을 한 것인데, 그 상사는 웬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같이 경쟁하는 동료들보다 조금 더 돋보일 정도로만 잘하면 경쟁에서 이겼을 것이다. 근데 나는 그들보다 월등히 잘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조직이라면 남들보다 월등히 잘하는 사람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많은 연구기관은 정상적인 조직일 가능성이 낮다. 내부 정치가 만연해 있고, 고인 물이 많으며, 해고가 어려운 특성 때문에 또라이로 찍히거나 불평불만이 많으면 오히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식으로 사람들이 건들지 않는 곳이다.

연구기관 생활 10년이 넘은 지금은, 나는 혼자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경험해 보니 나 혼자 잘해서도 일이 되는 게 아니더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잘해줘야 하고 함께 일하는 게 시너지 효과가 나야 일이 잘 돌아가는 것이더라. 근데 이 세월 동안 나는 내가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모든 상황에서 최상의 퍼포먼스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조금 부족하면 다른 사람이 그만큼 내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도 한다. 나 혼자 잘하려고 애쓰고 안달 낼 필요가 없더라.

하지만 나의 출신의 태생적 한계를 생각하면 그동안 목숨 걸고 직장을 다닌 것이 이해가 된다. 경쟁 조건 하에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있는 계약직은 뭘 해도 절박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건 10년 전 이야기이고 요새 세대들은 다른 것 같다. 기간만 채우면 정규직 전환이 되는 연구기관이라서 그런지 계약직 연구원들이 정규직 전환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

어쨌든, 비록 평가에 의해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있는 계약직이라 할지라도 너무 특출 나게 잘하려고 사생활 내팽개치고, 목숨 걸고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해봤더니 나와 같은 직급과 조건으로 정규직 전환되었지만 목숨 걸고 일하지 않는 직원에 비해 나를 노예 부리듯이 부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더라. 그저 남들 하는 만큼 눈치 봐가면서 일하고, 조금 더 열심히 하고 싶으면 남들보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