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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미 Feb 24. 2023

임종면회, 엄마와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혹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써달라고 한 책 원고가 가득인데, 저번주에는 엄마 책표지를 만들며 건강한 모습의 엄마께 책을 건네고 싶었는데, 엄마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렵다. 엄마와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다.


아픈 가족

    우리 집은 가족 모두 몸이 좋지 않다. 엄마는 삼 남매로 첫째인 엄마, 둘째 셋째인 삼촌 이렇게 세 가족이었다. 우리의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린 시절 돌아가셨고,

둘째 삼촌은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12년 돌아가시고, 셋째 삼촌은 2022년 돌아가셨다.

젊은 순으로 돌아가시는지 엄마의 형제는 남아있지 않았다. 동생을 다 잃은 엄마의 마음을 가늠하기 어렵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엄마의 죽음은 언니와 나는 예상하곤 있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연락은 너무나 당황스럽다.

신장투석을 받을 때도, 신장이식을 받았을 때도, 암수술을 받을 때도 항상 건강하게 웃으며 돌아오는 엄마였는데, 이번주 주말에는 내가 고향에 내려가 같이 여행하로 약속까지 했는데, 2월 첫 주 갑자기 몸이 좋지 않다는 엄마는 둘째 주에 병원에 입원하고, 셋째 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갑작스러운 연락

    21일까지 엄마는 나와 통화를 했다. '엄마 이제 괜찮아, 엄마 밥 먹고 있어'라고 했다.

하지만 22일에도 23일에도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고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22일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고 전화해 보니 엄마가 입원하신 병원이었다.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의사가 회신 중이여 다시 전화를 준다는 내용만 기다리라고 했다. 마음은 초조해지는데 엄마의 상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23년 2월 23일 오전 7시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간병인이 엄마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22일 코줄을 하기 싫다고 소란을 피우던 엄마가, 23일 의식을 잃었다는 소리였다. 호흡이 강하지 않다고 했다. 엄마가 일주일, 혹은 그전에 돌아가실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급하게 이동방법을 찾았다. 엄마가 계신 양산은 경상도 끝쪽에 위치하여, 북쪽가까이 일산에 사는 나에게는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김포공항 비행기 편을 알아본 뒤 12시 비행기를 예약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일찍 끊은 비행기였지만 비행기 수속하는 길 계속 눈물만 나왔다.


간호사 말

    공항에 도착해 병원에 또 전화를 걸었고, 의사에게 약속을 잡아달라고 했다. 담당간호사가 아니여 알아본다는 전화를 하고 끊었는데, 다른 간호사가 나에게 전화를 해 화를 냈다. 당일 내려오면 어떡하냐고, 오늘 의사 선생님을 못 볼 수 도 있는 거 아니냐고, 가족들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전화할 때라도 잘 받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도로 화를 냈다. 어제 부제 중을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으나 엄마의 내용을 아는 간호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가족 중 누구도 엄마에 상황에 대해 전달받은 것이 없으며, 오늘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지 못한다면 병원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을 테니, 내일이던, 모레던 의사약속 시간을 잡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제야 간호사는 수긍하며 오전 9시 병원에 의사 선생님이 회신을 도시니 그전 8시까지 병원에 대기하라고 했다. 알았다고 수긍을 한 뒤 비행기에 올랐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비행기는 한 시간 정도로 너무 울어서 그런지 휴대폰은 비행기 모드를 켜놓고 한 시간 기억 없이 잠들었다. 꿈을 자주 꾸는 나였지만 그 시간만은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비행기가 부산에 착륙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산행 비행기

    부산행 비행기는 이름은 부산이지만 김해공항으로 공항이었기에 엄마가 계시는 양산병원에 가기 위에

전철에 올랐다. 역에서 양산 가는 지하철에 오르는데 환승역은 사상역이었다. 엄마가 사는 집인 창원에서 부산에 가려면 항상 사상버스터미널에 내려 부산을 갔기에 사상역에서 엄마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계속 울었다. 예솔이에게 전화를 걸어 또 울었다.


요양병원과 호스피스병원

언니와 전화를 하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상의를 했다. 요양병원원보다는 언니와 우리 집 근처 호스피스 병원에서 엄마와 같이 있는 게 좋지 않냐는 말이었다. 나는 다 처음 듣는 소리여 인터넷에 검색을 했는데, 사형선고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존엄사라고 말하지만 치료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진통제와 사람들과 추억을 하며 삶을 마무리 짓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 알아보니 말을 하지 못하고 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호스피스 병원마저 갈 수 없었다. 그러면 엄마의 죽음의 끝까지 엄마옆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너무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장이고 문을 열고 들어갈 수 도 없었고 오전 9시 의사를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PCR검사

    사상에서 엄마가 계신 양산 지하철에서 들은 내용은 내가 당일 병원에 가도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코로나19로 간병인 외의 인원은 병원을 방문할 수 없고,  PCR검사를 받고 나서야 내일에야 병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창원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병원에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이상할 만큼 엄마병원에 가고 싶었고 엄마옆에 있고 싶었다.


간병인의 말

    병원에 도착한 후 간병인이 상황을 전달해 준다고 3층 로비에서 만나자고 했다. 병원 3층 로비에 올라와 있으니 간병인이 내려와 상황을 설명했다.

    엄마가 23일 오전의식을 잃었다. 오전 의사가 온 뒤 이름은 알았지만 오늘 날짜도 모르고, 이곳이 집인 줄 안다는 소리였다. 오전까지는 이름은 말했지만 오후 의식을 아주 잃은 상황이며 눈을 뜨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 이후 간병인의 말이 가관인데, 사람은 누구나 가족을 잃는다고, 그리고 유난히 이상하게 나에게  PCR을 하지 말고 동네 병원에서 신속항원검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함을 느꼈기에 PCR을 하고 병원에 대기를 하고 있었다. 결과를 기다리 던 중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임종면회

    아침까지 괜찮다는 엄마는 오후 갑작스럽게 임종을 준비할 만큼 병이 악화가 되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병원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엄마를 볼 수 있었을까? 유일하게 임종 전 면회에서만 가족들은 10분-1시간 정도 가족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도착했고 엄마는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돼있었다.

눈은 부워퉁퉁 불어있고 눈은 황달이 와있었다. 눈에는 하얀색 막이 생겨 있고 배는 복수 때문에 빵빵해져 있었다. 다리는 33킬로인 엄마가 나보다 얇지만 무릎과 발등은 너무 부어서 나보다 두꺼워 보였다.

엄마를 보고 계속 울었다. 손을 잡고 계속 울었다. 가족들도 다 울었지만 할 수 있다고, 사랑한다고 계속 말을 했다.


간병인

    엄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엄마는 1인실로 옮겨졌다. 나는 PCR검사 결과가 나왔고 음성으로 엄마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간병인에게 엄마 옆을 끝까지 내가 지키고 싶다고 말하니 의식도 없는 엄마에게 ~씨 나에게 좋은 거 쥔데매? 그게 뭔데? 이러며 볼을 치더니 화를 내며 짐을 챙기로 갔다. 어이가 없었다. 사실은 모르겠으나, 얼마 남지 않은 엄마를 딸이 지킨다고 하니 화를 낸다는 게, 그래서  pcr을 받지 말라고 한건 아닌지 의심까지 생겼으나 사실은 모른다.


기다림

    병원에서 시간이 얼마 남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기대를 가져보고 싶었다. 엄마가 우리를 본다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기다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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