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 얍! 얍! ㅆX 꺼져!!! 허공에 잽을 날리면서 달리기 시작한 지 17분이 지났다. 섬진강 대나무숲을 지나치는 순간 갑자기 뒷목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달리기가 힘들어 딱 죽을 맛이 느껴지는 순간 찾아온 오싹함은 육체의 힘듦을 상쇄시키기 충분했다. 어둠이 조금씩 들녘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골길, 인적이 없는 둘레길을 뛰다 보면 겁 없는 나에게도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호우로 불어나기 시작한 섬진강은 달의 정기를 받아 검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섬진강 둘레길은 가로등불 하나 없이 자전거 유도선만이 희미해서 발밑을 비춘다. 돌이라도 잘못 밟아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진다. 작년 한밤에 달리기를 하다가 돌부리에 넘어졌는데 응급실까지 다녀온 전적이 있어 잘 안다. 어둠에 익숙해지니 느릿느릿 움직이는 물체가 십 미터 앞 바닥에서 포착된다. 5m, 4m, 3m, 2m... 달밤에 산책 나온 거북이이다. 아씨, 놀랬잖아, 거북씨!! 그래도 뱀이 아닌 게 어디야. 1시간 가까이 달렸지만 차도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나의 데일리루틴 중 하나인 마라톤 연습이다.
재작년까지 나의 최애 러닝코스는 서울 노들섬이었다. 집에서 3km 정도 달려야 도착하는 노들섬. 북적이는 사람들과 5분마다 만나는 신호등은 끊임없이 나를 멈추게 했다. 미세먼지로 인해 마스크를 계속 고쳐 써야 하니 본격적인 코스에 진입할 즈음에는 이미 녹초가 되었다. 그런 고난을 30분 정도 이겨내면 확 트인 한강과 시원한 강바람이 선물처럼 찾아온다. 저 멀리 화려한 여의도 마천루 야경과 기다란 불빛을 강물에 흩뿌리며 다리를 건너는 2호선의 리드미컬한 전철소리를 사랑했다. 흔들리는 야경 속에 시티팝이 귀를 적시다가도 갑자기 쉬익 쉬익 내 숨결이 의식되는 그 순간들. 그러나 서울 직장인에게는 약속 없는 저녁, 일주일 단 하루 정도만 허용되는 일상의 사치였다.
왜 달리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러다 딱 죽겠다 싶은 심정이 들던 2~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600m 오래 달리기도 포기했던 체력이 30분 달리기를 견디고, 그렇게 50분, 1시간 늘어 갔다. 누구는 러너스하이를 사랑하고 서브 3 페이스를 말하지만, 3년 차 초보 러너인 나에게 달리기란 언제나 고행이다. 그런 고행길을 꾸준히 함께 해준 것은 내가 10개월간 머물렀던 귀촌센터 기숙사에서 구례읍 체육공원까지 이어지는 3km의 아름다운 시골 풍경이었다.
구례는 아침에 안개가 자욱이 낀다. 아침 9시 공식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텃밭을 잠시 돌아본 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이 길을 한 시간씩 뛰었다. 아침 달리기를 마치고 숙소로 복귀하면 버선발로 마중 나오던 동네 강아지. 어느 날 갑자기 고아가 돼버린 강아지는 귀촌동기의 보살핌으로 성견이 되었고 얼마 전 미국의 부자가족에게 입 센터 퇴소의 시간이 왔다. 10개월은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문척에 집을 얻었다. 적당한 크기의 텃밭도 있다. 그리고 모닝루틴이 바뀌었다. 매일 아침, 주인집 진돗개 동이와 닭장의 9마리 닭 돌보기. 그리고 달걀 수거하기. 겨울이라 텃밭을 가꿀 필요는 없으니 아침잠을 두 시간 늘리고 운동은 이제 밤에 하기로 했다.
회사의 재택근무 정책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내 업무도 점점 늘어갔다. 퇴사를 해야 하는 모든 이유를 끌어 모으던 중, 그사이 늘어난 새로운 프로젝트들과 시골살이의 안정감에 앞으로 2~3년은 더 버틸 수 있을 힘을 얻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회를 치를 수 있는 규모의 스타디움. 지리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여기서 챔피언 철인 3종 국제대회가 열렸었고 나는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구례에는 25m 레인이 6개가 있고, 온수풀에서는 지리산 노고단이 보이는 실내수영장이 있다. 이용객 수가 많지 않고 수질 관리가 매우 잘 되고 있어 수영인들에게는 천국이다. 서울에서는 집 근처 수영장 등록을 하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야 했다. 당시에는 겨울에도 새벽 수영 빠지지 않고 다녔지만 환경이 좋아지니 예전의 열정이 사라졌다. 그러나 서시천부터 체육공원까지 달리고 나면 바로 수영장으로 향한다. 20분 정도 자유 수영 하고 샤워하고 나오면 저녁 8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일리 루틴이 하루 10km 달리고 이어서 수영도 1시간 가까이한다고 했던가. 의도치 않게 나도 비슷한 루틴을 따르게 되었다.
스타디움 바로 옆 실내 수영장. 온수풀에서 지리산 노고단이 보인다. 청소시간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다. 잠시 뛰어나갈 여유조차 없는 바쁜 날에는 정자에서 사이클링을 한다. 섬진강을 바라보다가 책도 읽다가... 그렇게 발을 쉴 새 없이 돌리다 보면 30분은 금방 간다. 두 콧구멍이 뻥 뚫린 상태로 숨을 헉헉 거릴 수 있게 된 것은 구례에 오고 나서부터였다. 책은 50페이지는 읽으려고 했지만 결국 1페이지도 못 넘기고 경치에 시선을 빼앗긴다. 계절마다 바뀌는 산과 들의 모습. 그리고 내일이면 또 변해있을 섬진강.
동이는 주인집 개다. 주인집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구례에 오신다. 주인이 없는 집을 지키는 것이 익숙한 동이는 보채는 법이 없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냥 하루하루를 채워 나가는 동이. 가끔 나의 러닝메이트가 되어 섬진강둘레길을 함께 달리기도 한다.
동네 뒷산 산책. 행복한 동이의 뒷모습. 귀촌을 하고 나니 도시보다 시골의 운동환경이 훨씬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테니스, 수영, 탁구, 축구, 마라톤, 철인 3종, 파크골프, 등등 서울에서는 접근 난이도가 상당한 운동들이 지방자치 정부들의 지원으로 비용도 매우 저렴하고 시설 관리도 잘 되고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진 이웃들이 많다. 운동으로 맺은 건강한 관계들과 건강해진 심신. 역시 운동은 만병통치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