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자정 넘어 선약 없었던 술자리가 생겼다. 마침 출출하던 차에 고민 없이 나가 맥주를 들이켰다. 여름밤에는 맥주가 생각나고 겨울밤에는 소주가 생각난다. 맥주는 여럿이 마시는 게 좋고 소주는 혼자 마시는 게 좋다는 취향이 확고해졌다. 여름밤. 꼬치와 맥주. 굳이 내게 말을 시키지 않는 사람. 딱 좋았다.
술집 주인이 술자리에 합류했다. 내게는 낯선 사람이었고 초면에 술자리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내겐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내게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쉴 새 없이 질문을 받았고 성실하게 대답하는 사이 맥주의 체온은 오르고 있었다. 어떤 질문에 내가 대답하기를, 키우는 반려견이 하늘로 가면 집시처럼 전 세계를 유랑하다가 길에서 죽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의 톤앤매너가 흐트러졌다.
“그럼 안되죠. 사랑도 하고 계속 사람을 만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죠.”
“안되는 게 어딨어요? 제 삶인데요.”
“혼 좀 나야겠네요.”
“제가 살아온 인생을 모르시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때부터 나 역시 대외적으로 쓰던 톤앤매너를 내려놓았다. 대화하는 상대가 삶을 규정하는 스타일이라면 나는 입을 닫는 쪽이다. 한쪽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다른 쪽이 공감하지 못하고 설득당하지 않고 인정하는 배려가 없다면 그 대화는 미지근한 맥주만큼 맛이 없다.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쌓아 올려 좌뇌와 우뇌 사이에 벽을 만들어 놓은 사람과 대화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보다 조금 덜 괴로운 식은 맥주를 마시며 시선을 돌렸다. 성미 급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엄마한테도 자주 한 말이었다.
“엄마, 장군이가 날 떠나면 나는 세계를 떠돌며 살고 싶어.”
이렇게 길게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는 떠날 거라서. 나는 떠날 사람인데 남겨질 사람을 만들면 나쁘지 않나. 지금은 반려견과 문학이 있어 그럭저럭 살고 있지만, 반려견이 사라지면 문학만으로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다시 반려동물을 들이고 싶지도 않다. 그저 훨훨. 가보지 못한 세계를 구경하고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뱉지 못했던 말들을 뱉으며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늘 어딘가에 얽매였던 삶에서 해방되고 싶다. 사람도 책임감도 지긋지긋하다.
내 마음을, 계획을 타인이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상관있는 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하는 태도다. 비난하려고 들면 어디 완벽한 삶이 있을 텐가. 비난하는 당자의 삶도 얼마든지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비난에 비난으로 대처하는 건 경험상 옳지 않다. 누구나 혀에 칼을 차고 있지만 나이 들수록 칼은 무뎌지고 칼집은 단단하게 만드는 스킬을 배운다. 그때는 그저 침묵으로 이끈다. 침묵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으로 안내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결코 이기지 못하는 게임. 나는 그걸 잘 하는 사람이다.
내 생각과 인생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살아.”
하고 싶은 건 없고 하기 싫은 것만 투성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숨 쉬는 것도 짜증 났던. 모든 게 싫었던. 집으로 가는 것도 싫고 집에서 나가는 것도 싫어. 먹는 것도 싫고 싸는 것도 싫어. 자는 것도 싫고 깨는 건 더 싫어. 어쩌라고! 엄마는 그 말을 자주 했다. 어쩌라고! 엄마 반응이 맞았다. 어쩌라고. 모든 게 싫어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삶이 방향을 탈 수 없었으니 매번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긴 지금 내 마음이 얼마나 비옥한지 모른다. 하면 되니까. 가면 되니까. 실패하면 어때. 생각해보면 인생은 결국 인간이 실패하는 게임이다. 아무리 잘 살아도 강제로 게임 오버 되니까. 그렇다면 게임 속에서 즐기다 가는 수밖에.
인생은 게임이다. 게임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고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얼마만큼 빠져들지도 본인 선택이다. 본인과 다른 게임을 한다고 해서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캐릭터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당신 취향이다. 레벨은 어떤지 아이템은 많은지 남의 게임 기웃거릴 시간에 본인들 게임이나 잘했으면 좋겠다. 무관심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하고 타인의 게임에 훈수 두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