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는 밤과 어둠과 검정을 좋아한다. 그것들을 좋아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는지, 글을 쓰기 때문에 그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밤과 어둠과 검정을 좋아하려면 불면과 우울 또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10년째 약을 먹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한 달 동안 불면과 우울을 견뎌줄 약을 탄다. 약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의사에게 말한 적이 있다. 밤새워 글 쓰고 낮에는 자야 하는데, 밝을 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잉여시간인데,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은 내 소설의 원천인데, 나는 여전히 낮에도 밤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시골 첩첩산중이었지만, 꽤 넓은 집에서 살았다. 대지가 100평, 집은 20평이었다. 10평 정도의 텃밭이 마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담벼락이 없어서 마당이 바로 산과 연결되는 집. 고라니와 뱀 정도는 지겨울 정도로 만나고 가끔 멧돼지가 출몰하는 곳. 거기서 혼자 5년을 살았다. 거기 살 때는 드문드문 약을 먹었다. 우울증약은 끊었고 수면제만 처방받았다. 그곳의 밤은 글쓰기에 과분하게 훌륭했고 낮은 잠자기에 알맞게 조용했다. 아마 그래서 불안한 사람이 꽤 안정적으로 지냈던 것 같다.
이제, 서울에서 다시 얻은 불안과 화에 관해 말해보련다. 이 집에서 얻은 불안과 화는 소리에 기인한다. 가난한 나는 서울에 낡은 빌라를 월세로 얻었다. 반려견, 주차. 그 두 가지만이 집을 찾는 조건이었다. 그나마 방이 두 칸이라 한 칸에서는 잠을 자고 한 칸에서는 글을 쓴다. 나는 서울에 와서야, 이 집에 와서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소음을 견디며 사는지 깨달았다. 어쩌면 익숙해졌을지도 모르지. 생활 소음이 있어야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 어쨌든 중문이 없고 새시가 구식인 우리 집에는 다양한 소리가 매일 들린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걸음 소리. 차와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 가래침 뱉는 소리. 싸우는 소리. 텔레비전 소리. 음악 소리. 전화 통화 소리. 현관문 닫는 소리. 소리였다가 소음이 되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눈에 띄는 걸 싫어해서 밤에만 산책하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집에 틀어박혀 있다. 이 집에 1년 넘게 살았는데, 이웃들은 내가 사는지도 개가 사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내가 소음을 낼 상황은 거의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키보드 치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지는 않으니까. 전화 통화는 거의 안 하고 자동차는 건물 뒤편에 세워뒀고 누군가와 싸우지도 않고 가래침도 뱉지 않으니까. 어쩌면 우리 집이 너무 조용해서 소음이란 게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이웃들은 잘 모르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밤과 어둠과 검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나 자신이 내는 소음도 싫다. 정말 피곤한 성격이지. 온몸이 바닷물 아래에 처박힌 느낌이 좋다. 말하지도 못하고 들리지도 않고 살기 위해 발버둥 쳐도 발각되지 않는. 나는 그런 느낌으로 하루 온종일 글만 쓴다. 지난 십 년간 만들어지고 누적된 보호막은 바닷물보다도 깊고 아득하다. 그런데 자꾸 소음이 내 보호막을 찢고 있다.
어느 날인가, 옆집 아이가 울었다. 아이니까 울겠지. 달래겠지. 아이 엄마는 달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우는 소리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엉덩이 대! 아이를 더 울리고 있었다. 아이는 거의 경기하듯 울었다. 시간이 무려 자정이었다. 미친 건가? 아이와 부모의 기 싸움은 꽤 오래 이어졌다. 나는 당장 달려가 소리치고 싶었다. 저기요, 미쳤어요? 지금이 몇 시냐고요!
이사 온 지 1년 6개월 만에 친구가 생겼다. 3층에 사는 여자 사람인데, 나보다 조금 어리고 신혼이었다. 그 친구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바닥이 흔들렸다. 놀란 내가 “건물이 무너지려고 한다!”고 말했고, 친구는 바닥에 앉아 익숙한 듯 손바닥을 엉덩이 아래에 깔고 진동을 느꼈다. 아랫집, 그러니까 아까 말한 그 아이 집에서 아이들이 뛰면 이 사태가 난다고 했다. 친구는 스트레스를 받아 바닥에 쿠션을 깔다가 결국 소파를 들였다. “바닥에 안 앉으면 돼요.”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조금 손해 보고 마는 사람.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 싸우기 싫은 사람.
내 소설에는 주로 폭력이나 죽음이 등장했다. 관심사는 오로지 그것이었다. 그것들이 내 성격과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니 그런 주제에 침잠하는 건 당연했다. 행짜를 부리거나 방종한 자들을 응징하는 수단으로 나는 소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쓴 소설에 소음이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살인까지 갈 뻔했는데 좋게 끝냈다. 그 소설을 쓰면서 생각했다. 층간 소음으로 벌어지는 살인에 관해. 항의해도 바뀌지 않는 방종한 인간들에 관해. 그 전에,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인격에 관해. 그 그 전에, 그들이 그런 인간이 된 원인에 관해 계속 생각했다.
집이 너무 시끄러우면 차에 가거나 뒷산에 올라가 책을 읽기도 한다. 차에 있으면 꼭 남자 한두 명은 출몰한다. 그들은 본인의 차에 타서 좌석을 뒤로 쭉 밀어 넣고 유튜브를 본다. 집안에 자유 공간이 없는 유부남들이다. 본인도 자유를 찾아 주차장으로 왔겠지만, 고요를 찾아온 내게는 다른 소음이 생긴다. 춥거나 더울 때 그들은 줄곧 시동을 켠다. 볼륨을 한껏 높인 방송 소리와 그걸 보면서 낄낄대는 아저씨 소리. 산에 가도 마찬가지다. 정자에 앉아 책을 보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나타나는 아줌마 부대를 만난다. 세상에 자기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신나게 떠드는 아줌마들. 나는 다시 집안으로 기어들어 온다.
살기 위해선 익숙해져야 한다, 익숙해지자, 신경 쓰지 말자. 아무리 마음을 다져도 소음은 내 하루를 엉망으로 만들곤 한다. 책을 읽을 때는 그나마 덮으면 되는데, 글을 쓸 때는 돌아버린다. 신경이 회칼처럼 살기 넘친다. 다시 산으로 이사하지 않는 한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서울 어디쯤 담이 높은 전원주택에서 살 능력은 안 되니까. 나는 내 칼을 무디게 만드는 노력도 하지만, 소심한 항의를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옆집 아줌마가 소리 지를 때 나도 소리 지르기. 가장 잘 들릴 장소로 가서 마치 통화하듯이 자연스럽게. 그러면 옆집 아줌마 목소리가 잦아드는 게 느껴진다. 그것도 잠깐이다. 인생이 해까닥 돌아버릴 만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반드시 변하기도 한다. 옛날 같았으면 대판 싸개가 나도 여러 번 났을 것인데, 이제는 참는다. 싸우기 싫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을 기다리는 것. 그래서 나는 더 늦게 자게 되었다. 집필을 시작하는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늦어져서 끝내는 시간 역시 그렇다.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과 차로 인한 소음이 생기니까 나는 그 시간에 맞춰 약을 먹곤 한다. 당연히 예전보다 늦게 일어난다. 내게 불면과 우울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서울에 와서 꾸준히 항우울제와 수면제와 안정제 등을 처방받았다. 익숙한 진료와 처방이지만, 그 원인은 달라졌다. 폭력과 트라우마에서 '소음'으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 살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낸다. 계약 기간 2년 못 채우고 나갈 거라던 산골 마을 어르신들의 예상과 달리 나는 5년을 살았으니까. 여기에서도, 이 낡고 비루한 빌라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글을 쓰고 살아갈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밤과 어둠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모두가 살기 위해 소음을 내는 거라 믿는다. 그리 생각하면 연민이 생기기도 한다. 사느라 고생한다, 다들. 인간에게 갖는 연민은 살인도 면케 만들지. 서울에 살면서 소음과 연결되지 않으려면 관에 들어가는 수밖에. 근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내 주변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