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고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시간과 가격이 아닐까 싶다. 인천에서 뮌헨으로 가는 직항기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국내 항공사다 보니 가격이 좀 더 비쌌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한 게 런던 히드로 공항을 경유하는 'British airways'의 비행기였다. 최저가는 아니었지만 런던을 간다는 점이 아주 쏙 마음에 들었다.
10년 넘게 응원하고 있는 '아스날'이라는 축구팀 때문이었다. 런던을 연고로 하는 팀이기에 나에게 있어 영국은 무조건 가야 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여자친구와 상의한 결과 캠핑카로 3개월 동안 온갖 지역을 돌아다니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남유럽을 중심으로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면서 아쉽게도 영국은 이번 여행의 행선지에서 제외되었다.
비록 런던을 돌아다니지는 못하더라도 히드로 공항에 간다면 어찌 되었든 영국 땅을 밟는 것 아니겠는가. 이게 'British airways'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런던 상공 위에서 '오! 저게 바로 아스날의 홈구장이군'이라 감탄하며 여행의 기대감에 잔뜩 젖어있을 무렵 갑자기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공항 사정으로 인해 비행기 착륙이 30분 지연됩니다"
살면서 처음 겪어 보는 비행기 연착이었다. 비행기를 많이 타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정각 혹은 10분 정도 일찍 도착한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그런데 연착이라니. 그것도 30분이나!
더 큰 문제는 뮌헨행 비행기 출발 시간은 오후 4시 30분이라는 것이었다. 예정대로였다면 히드로 공항 도착 예정 시간은 3시.
그래, 30분 연착이니 착륙 시간은 3시 30분 정도가 될 테고. 게이트에 도킹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3시 40분. 이 정도면 무사히 환승할 수 있겠지?
탑승 수속이 15분 전 마감임을 고려하면 적어도 4시 15분까지는 게이트에 가야 했었다. 아슬아슬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가능은 할 듯싶었다.
비행기표를 예약했을 때도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었다. 그래도 '설마 큰 문제가 생기겠어?' 하는 마음으로 티켓을 예매했는데 그 설마가 현실이 되어버릴 줄이야.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말 그대로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안내방송과는 다르게 비행기는 런던 하늘을 두 바퀴나 돌며 45분이 지나서야 히드로 공항 활주로에 내려섰다.
더욱 초조해졌다.
뮌헨행 비행기는 5번 터미널인데 내가 내리는 곳은 어디지? 티켓에는 안 적혀 있는데. 아, 미쳐버리겠네! 이러다 놓치는 거 아니야?
천만다행으로 비행기가 착륙한 곳도 5번 터미널이었다.
비록 같은 터미널이었지만 여전히 뮌헨행 게이트까지는 거리가 남아 있는 상태. 안심할 수 없었다.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닌 끝에 탑승 수속 5분을 남겨두고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같은 터미널일 수밖에 없었다. 런던행, 뮌헨행 비행기 모두 'British airways'의 비행기이지 않은가. 같은 항공사, 그것도 영국의 항공사인데 당연한 거였다.
승무원에게 물어보기만 하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었기에 이런 생각조차 못 하고 똥개처럼 안절부절못했었다. 아오, 멍청이!)
뮌헨 공항에 도착해 여권 도장을 받았을 땐 '아, 드디어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구나'하는 마음에 신이 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곧 있으면 2개월 만에 여자친구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자친구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첫 번째로 수하물을 챙기러 갔지만 어째서인지 내 캐리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 마지막에 나오겠지. 기다려 보자.
그러나 내 뒤에 온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캐리어를 챙기고 떠나간 자리에 남은 건 오직 컨베이어 벨트 위 화면에 떠 있는 Completed라는 안내 문구뿐이었다.
조금 생각해 보니 짐이 도착하지 않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조차도 미친 듯이 뛰어서 뮌헨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하물이 무슨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 내가 뮌헨으로 갈 것을 알 리도 없었을 텐데 비행기에 선적될 리가 만무했다.
어째, 처음부터 쉽지 않네
흥분되었던 마음을 가라앉힌 뒤 공항 직원에게 물어봤다.
나 : 실례합니다. 제 캐리어가 도착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공항 직원 : 아, 그거 다음 비행기로 도착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머무를 호텔을 알려주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나 : 아, 진짜요? 너무 감사합니다.
다음 날 아침, 기대와는 달리 공항에선 어떤 것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무한정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 오늘 안에는 가져다주겠지 싶어 일단 호텔을 나섰다. 그날 당장 캠핑카를 인수해야 하기도 했었고.
저녁쯤이 되었을 때 캠핑카를 몰아 호텔에 들렀다.
나 : 혹시 공항에서 캐리어 하나 오지 않았나요?
호텔 프런트 직원 : 아니요, 안 왔어요.
그제야 공항에 전화해 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들은 건 내 짐이 아직도 런던에 있다는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아니, 미친! 어제 분명 다음 비행기로 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침에 못 받은 거야 그럴 수도 있다 쳐. 그런데 하루가 넘게 지났는데도 런던에 있다고? 무슨 이런 경우가 있어?
공항 직원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내가 바보였다. 연착되었을 때부터 계속 의심을 했었어야 하거늘.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성질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닌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잠시 고민을 하다 공항 쪽과 다시 연락했다.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원에 머물고 있을 테니 거기로 내 캐리어를 보내달라고 부탁한 게 그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뮌헨에 온 지 3일째 되는 날, 무려 밤 10시가 되어서야 내 캐리어와 마침내 상봉할 수 있었다.
사실 뮌헨에서 며칠 머물 예정이라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기내 수하물에 어떤 옷가지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공항에 다시 연락을 했을 때가 한국 집을 나선 지 이틀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겉옷이야 그렇다 치지만 속옷을 이틀 동안 입는다는 게 너무 찝찝했다. 그리고 그 속옷을 하루 더 입어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땐 정말 깊은 빡침이 몰려왔었다.
2박 3일로 지리산 등산을 했을 때도, 일주일 동안 혼자 도보여행을 했을 때도 빨래를 하진 않았어도 속옷만큼은 매일 갈아입었다. 그런데 선진국 중에서도 선진국인 독일의 도시 한복판에서 사흘 동안 같은 속옷을 입었다니.
덕분에 새 팬티를 입었을 때의 행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조삼모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군대 야간 행군 중 쉬는 시간에 먹는 육개장 사발면 같은 느낌이랄까. 사흘 내내 성질이 나 있었으면서 고작 새 팬티 하나 입었다고 그렇게 상쾌해질 줄이야.
그날 밤은 뽀송뽀송한 속옷과 함께 따뜻하고 아늑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부터 속옷은 꼭 기내 수하물에 챙겨서 다녀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또 하나, 아마 그때가 유럽 국가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진 첫 번째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클레임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이 넘도록 캐리어를 보내 주지 않는 건 한국에서는 꽤나 상상하기 힘들다.
코로나 시국을 겪으면서 지금이야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유럽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모든 면에 있어서 유럽 국가가 우리나라보다 낫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고 나 역시 그랬었다.
그런 기대를 안고 도착한 유럽에서 처음부터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버렸으니 실망감이 들긴 했다.
그래도 덕분에 인식의 전환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럽에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역시 모든 일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