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였을까. 말다툼 혹은 말장난 끝에 서로를 비난하면서 던지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행어는 싸움을 늘 웃음으로 끝나게 하는 말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한껏 비아냥을 담아 던졌던 그 말을 이제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유행어를 나 혼자 뿌려대면서 진심으로 한숨을 쉰다.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는 나의 외침과 달리 아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자기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기 어려워 한다. 그 나이에 자신을 아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않다.
며칠 전, 연습이 필요한 리코더와 가창 수행평가가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평가 안내와 더불어 매일 '연습하기'를 숙제로 내주었다. 수행평가 전, 한번 확인한다고 언질을 주었다. 확인해 보니 연습해 온 아이는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로 적었다. 대부분 한두 번 불어보거나 불러보았을 뿐 연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칭 모범생인 녀석들도 나의 핀잔에 볼이 부었다. 연습했으나 충분하지 않았을 뿐이라 했다. 또 어떤 녀석은 자기는 원래 '음치'라 하고 어떤 녀석은 질세라 자기는 '박치'라 한다. 어이없이 바라보다 툭 하고 내뱉었다.
"선생님은 음치에 박치야. 다만 연습하니까 기본은 하는 거지. 안 되는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서 연습했어?"
음치와 박치라 대놓고 인정하는 나에게 할 말이 없어진 아이들은 내일 해온다고 다짐하고 돌아섰다. 연습에 대한 잔소리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허걱 했던 것은 그날의 아이들 댓글이었다. 뒤끝이 긴 나는 알림장 댓글의 주제로 '연습의 필요성과 나의 연습상태'를 적으라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기는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연습을 잘한다고 달았다. 자신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하루종일 연습에 대해 긴 잔소리를 들은 녀석들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연습한다는 답을 하다니.. 기가 찼다. 어이없어 잠깐 머리를 띵했다. 그래서 오히려 아침이 기다려졌다. 어떤 말로 진실을 깨닫게 해야 하나라는 고민의 칼을 갈면서 아이들을 마주할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드디어 두둥.. 아침이 왔다. 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것을 확인하고 친절하게 누가 어떤 댓글을 달았는지 읽어주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연습을 많이 하는 00 씨"라고 불렀다. 눈을 피하고 고개를 숙이는 녀석들을 보니 자신들이 연습을 안 한 것은 아나보다 싶었다. 또다시 자기 객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면서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폐해에 대해 또 한 번 짚었다. 왜 인정이 중요한지, 객관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지 강조했다. 아이들은 아마 귀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현 상태를 아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성숙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지금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나이를 먹는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성숙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많은 잔소리 끝에 전하고 싶은 마음은 그거였다. 돌아봄으로 나아갈 길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 하는 바람이었다.
지금도 공부하고 책을 보는 이유는 나를 제대로 알고 마주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했다. 그렇다. 나 역시 아직도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나 역시 나를 돌아보며 나란 사람에 대해 들여다본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나온 소크라테스처럼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대화를 사랑하길, 특히 자신과의 대화를 즐기면서 자기를 일아가길!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사랑하긴 했지만 그는 대화를 그저 자신이 가진 도구 중 하나로 본 것 같다. 이 모든 현명한 훈수질에는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웠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