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Nov 06. 2024

제대로 화내기

금방 화를 내는 것도 제대로 화를 안 내는 것도 문제란다.

  화를 제대로 내는 것을  가르쳤던가. 우리는 참는 법, 화내지 않고 말하는 법을 가르칠지언정 제대로 화내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보다보니 가르치긴했다. 첫째 딸이 세 살 때인가. 그때만 해도 천사 같던 첫째를 둘째가 장난으로 혹은 화가 나서 온 힘을 다해 물었을 때 그냥 물리고만 있었다. 피멍이 들 때까지 밀지도 못하고 화내지도 못하고 그저 애처롭게 "엄마"를 부르면서 기다렸다. 깜짝 놀라 달려가서 둘째를 떼어내고 확인해 보면 어김없이 잇자국 주변에 피멍이 들어있다. 그때까지 참고 있던 첫째가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왜 때리거나 밀어내지 않았어? 왜 소리 지르거나 화내지 않았어?"

  "때리거나 밀면 쟤가 아프잖아."

에구야~그럼 언제까지 물리고 있을 참이었다를 물어보려다 이미 아픈 아이를 몰아세우는 것 같아 관뒀다. 대신 신신당부했다. 같은 일이 또 생기면 힘껏 밀어내라고. 그래도 다치지 않고 너도 많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고. 어린이집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무조건 참고 있을까 봐 화내면서 단호하게 말하는 법, 거절하는 법을 가르쳤다. 나의 말을 따라 하게 하면서 어떤 톤으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상황극을 곁들여가면서 연습시켰다. 지금에서야 그게 역효과가 나는 느낌이긴 하지만... 화를 제대로 내는 것은 여러모로 중요하다.


  며칠 전, 한 아이가 집요하게 다른 아이 놀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이들끼리의 일이기도 했지만 그 아이가 워낙 모범적인 아이라 하다 말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러나 결국 놀림을 당한 아이는 견디다 못해 나에게 말하러 나왔다. 1학기 말부터 지속되던 놀림인 데다가 머리에 하얀 것이 뭐냐는 예민한 질문을 쫓아다니면서 하기에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했다. 놀리던 아이를 불렀다. 이유를 물었더니 상대 아이가 자기에게 늘 까칠하게 말하는 데다가 짜증내서 그랬단다. 자기는 분명히 하지 말라 했으나 짜증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아 자기도 계속 그러는 거라고. 복수심이냐고 물었고 뒤끝이 왜 그리 기냐고, 상대의 짜증을 받아치는 척하면서 결국 화내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곤란한 질문 공격을 한 거 아니냐고. 아이는 인정했으나 조금 억울해했다. 그래서 차라리 화를 내라 했다. 상대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면 버럭 화를 내고 끝내는 것이 낫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집요하게 뒤끝 부리는 것은 치사하 다했다. 어찌어찌 해결은 했지만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이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가뭄에 콩 나듯이 친한 친구에게 짧게 버럭 한 적은 있어도 진짜 화내야 할 때도 조용조용 참으면서 넘어가는 녀석이었다. 

  다음 날, 아이를 불러서 물었다. 화를 내지 않는 이유를. 그랬더니 집에서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고 화를 표현했을 때 혼났다했다. 아이는 참는 것이 습관 되었고 상대가 버럭 하면 자신이 옳아도 수그러드는 것을 당연시했다. 화를 내는 것이 그리도 나쁜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기표현을 제대로 하는 것은 중요하다. 꼭 화를 내지 않아도 정확하게 자기감정을 말하는 것은 살면서 정말 필요하다, 그게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쌓아 두다 보면 이상한 상황에서 이상하게 표현된다. 자기감정이나 의도를 제대로 담아내지도 못한다.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고 대립하는 시간이 견디기 힘들다 했다. <라디오 체조>의 이라부의 말이 떠올랐다.

  이라부가 "금방 화를 내는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화를 안내는 것도 문제거든."이라고 덧붙였다.
"이건 일본 사람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지. 타인의 규칙 위반이나 부도덕한 행동을 봐도 대립을 피하기 위해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렇게 분노가 쌓여서, 결국은 자기 안에서 폭발해 버리는 거지. 후쿠모토 씨의 과호흡이나 공황장애는 거기에서 온 거야. 그러니 쉽게 고칠 수 있어. 화를 내면 돼."
-오쿠다 히데오의 <라디오 체조>

  제대로 화를 내지 못하거나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두려워 표현하지 않고 안에 쌓아두면 이라부 말대로 언제인가는 폭발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상대와의 관계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된다. 쌓아둔 화가 혹은 감정이 어떻게 표현될지 모르기 때문에.

  결국, 자기감정을 적당하게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상대가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듣거나 말거나 그건 상대의 몫으로 두면 된다. 내가 담담하게 내 표현을 하고 내 의견을 말했는데 대립하거니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멀어지거나 관계가 어긋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 아이들에게도 어른에게도 필요하다. 사실 나도 그게  참 어렵다.

작가의 이전글 애송이의 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