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 내가 누렸던 평화를 생각할 때마다 어린 날의 커다란 상처로부터 일용한 양식, 필요한 물건, 입고 다니던 입성, 그리고 식구들 사이, 집 안 속 가득히 고루 스며 있던 어머니의 입김, 그 따스함이나 숨결이 어제인 듯 되살아난다. 그것을 빼놓은 평화란 상상도 할 수 없다.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 어린 날이 어디 있으랴. 다만 그런 일이 어머니의 입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행복과 평화로 회상되는 게 아닐까? -중략- 나보다 내 자식들이, 내 자식들보다는 손자들이 따뜻한 입김의 덕을 덜 보고 자라는 게 아닌가 싶다. 그건 부모의 허물만도 아닌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구태어 입김을 거칠 필요 없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까지도 매스컴이나 그 밖의 정보를 통해 대량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집집마다 대대로 물려오는 입김에 서린 가풍마저 소멸해가고 있다. -중략- 입김이란 곧 살아있는 표시인 숨결이고 사랑이 아닐까?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심심해하지 않는 게 평화가 아니라 그런 일이 입김 속에서 즉 사랑 속에서 될 수 있는 대로 활발하게 일어나는 게 평화가 아닐는지.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