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바람
어쩌다 보니 매일 운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아이들 학교까지 왕복 30분 거리. 등하교 합해서 한 시간이 기본이고 마트, 학원, 병원, 도서관 등등 한 바퀴 돌고 나면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은 거뜬히 추가된다. 그러니까 하루 평균 두 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렇게 매일 운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신기하다. 나에게 차가 있다니, 그 차를 내가 운전하고 있다니, 심지어 7인승을! 10년 넘게 엄마로 살고 있으면서도 엄마인 내가 여전히 생소하듯 운전을 하는 내 모습도 그렇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고3 겨울방학 때 운전면허를 땄다. 주변 어른들도 이때 아니면 따기 어렵다며 빨리 따놓으라고 했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차가 있는 어른의 모습은 나와는 너무 먼 이야기였다. 그래서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 당시 흠뻑 빠져있던 만화책과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러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들이(결혼-귀촌-출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순식간에 이루어지면서 운전의 필요성 역시 갑작스레 찾아오게 되었다.
교통이 열악한 시골에서 버스의 배차 간격은 보통 한 시간 간격. 사실 한 시간 배차 간격도 차가 매우 많이 오는 편에 속하고 대부분 큰길에서 탈 수 있는 차들이다. 큰길 안 쪽, 그러니까 마을로 들어오는 차는 하루에 두 세대가 없는 경우도 많다. 차를 한번 놓치면 기본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타려면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게다가 도착 시간이 앞뒤로 10분 이상씩 제멋대로여서 시골에서 버스를 타는 일은 기다림과 예고 없는 변동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더구나 나는 항상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해서 언제나 짐이 한 가득이었다. 10킬로 넘는 아이를 포함해 이런저런 짐을 이고 지고 다녔으니 못 해도 기본 15킬로는 들고 다녔을 것이다. 다행히 인구 밀도가 워낙 적어서 버스를 서서 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차가 없는 시골 생활자, 그것도 육아를 하는 입장에서는 외출 한번 하려면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래도 그때 나는 젊고 튼튼하고 모유수유를 하느라 몸도 꽤나 커져 있는 상태여서 힘들어도 다닐만했는데 오히려 그때 나를 만났던 사람들은 좀 놀랐던 모양이다. 언젠가 내 동생이 마을에서 노해원씨 동생이라고 했더니 “아, 그때 애기랑 버스 타고 뜨개질 배우러 오던 분!”이라며 그때 내 모습이 정말 놀라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난 일인데 나를 떠올리는 첫 장면이 그 모습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내 특기 중 하나는 불편하다, 불편하다 하면서도 끝까지 버티고 보는 미련함인지 근성인지 모를 그런 것이어서 운전면허를 따는 것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했다. 이렇게 버티며 지내는 동안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은 세상은 알다가도 모르게 흘러가는 것이고 필요라는 것은 느닷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며 무엇보다 엄마 말은(듣기 싫어도) 잘 듣는 것이 이롭다는 것.(엄마는 내가 성인이 된 이래로 수없이 자격증을 따라고 했고 운전면허도 그 자격증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나는 운전이 정말 하고 싶었다. 무사고 운전 베테랑 아버지 옆에 앉아 나는 언제쯤 핸들과 기어와 브레이크, 엑셀, 깜빡이를 만지며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동안 아버지가 몰아왔던 차들은 티코, 프라이드, 더블 캡, 마티즈, 모닝 이었는데. 트럭이었던 더블 캡을 제외하고 모두 소형차였으며 대부분 수동 기어로 움직이는 차들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크러치를 밟으며 기어 변속을 하는 모습을 좋아했고 가끔은 부러웠다. 아버지는 기어 변속을 할 때마다 신기해하는 나에게 1단은 몇에서 몇 킬로, 2단은 몇에서 몇 킬로라고 하며 기어 변속의 규칙을 알려주었다. 심지어 술에 취해 조수석에 앉아 반쯤 잠들어 있을 때에도, 엄마가 기어 변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 으르렁 거리는 차 소리가 나면 지금 몇 단 기어를 넣어야 하는지 잔소리를 했다. “2단 넣어야지.” “지금은 3단.” “어허, 4단 넣으세요 4단.” 나는 속으로 그 규칙들을 외우며 언젠가 내가 커서 운전을 하게 되면 나도 꼭 수동기어로 된 자동차를 몰아 보겠노라 다짐하곤 했다.
부모님이 가장 최근까지 탔었던 모닝은 소형차+수동기어+LPG 차여서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가성비 차였음이 분명했다. 때마침 모닝을 구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결혼을 했고 지역으로 내려가 첫 손주인 울림이까지 태어났기 때문에 왕복 6시간 넘게 걸리는 우리 집에도 옆동네 다니듯 부담 없이 오갔다. 아버지는 전국 방방곡곡 모닝을 끌고 다니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택시운전 했으면 잘 맞았을 것 같아.” 그렇게 열심히 타고 다녔던 모닝을 최근 폐차를 시키게 되었는데 동생은 견인차가 모닝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조금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나도 동생이 올려 준 끌려가는 모닝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좀 찡해졌다. 그 영상 바로 밑에 아버지는 “2011년 1월부터 13년 6개월 동안 우리를 태워 돌아다니느라 애썼다.”라는 감상과 함께 “엔진이 나갔다고 10만 원 깎였어. 30만 원 고철값만 받네.”하며 아쉬워했다.
운전을 하고 싶어 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에 ‘지프 타고 160킬로로 달리기’를 꼭 적었다.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절대 밟을 수 없는 속도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운전하는 삶에 대한 헛된 로망이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청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우리 바다 갈까?”하고 훌쩍 떠나는 모습이라던가 선글라스를 끼고 창문을 연 채 담배를 물고 한 손으로 멋지게 운전하는 모습 같은 것들.(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내가 운전대를 잡는 순간 나의 목숨과 더불어 내가 태운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고 사고가 난 다음 날에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붙들고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대를 잡아야만 하는 서늘한 현실이었다. 몇 번의 사고는 차를 폐차시킬 뻔한 큰 사고였는데(눈길에 차가 도랑에 빠졌던 날, 마을 할아버지들이 차에서 아이들을 꺼내주며 ‘어이고, 애들이 계속 나오네’라고 했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는 옆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아이들 학교를 데려다주고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사러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모든 차들이 나에게 달려드는 것만 같았던 첫 도로주행을 시작으로 지금은 ‘주차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듣는 8년 차 드라이버가 되었다. 베스트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너무 많은 사고를 냈지만(...) 그래도 매일 열심히 운전하며 사는 내가 대견하다. 다년간 같은 길 위를 규칙적으로 다니다 보니 요즘은 운전을 하는 시간이 명상하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특히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느끼는 해방감을 느끼기에 운전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여전히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바다 갈까?”하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주는 커다란 여지들에 마음을 기대곤 한다.
나는 언제까지 운전을 하고 얼마나 운전을 하면 나의 아버지처럼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 있을까. 이미 사고 친 횟수에서 도달하기 어려운 길 인 것 같지만 그래도 내년에는 언제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여지가 너무 공허해 지지 않도록 더 먼 곳까지 운전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