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의 하루를 보여주는 것에는 친절하지만 히라야마의 삶을 보여주는 것에는 불친절하다. 우리는 주변 인물(히라야마의 여동생, 조카, 청소부 동료)의 극히 파편적인 진술을 통해서만 히라야마의 과거(-이를테면 그가 왜 청소부 일을 시작했는지,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는지-)를 짐작할 수 밖에 없다. 히라야마의 미래 또한 그려낼 수 없다. 다음에 바다를 같이 보러 가고 싶다는 조카의 부탁에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고 답하며 '다음'에 대한 상상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인물이 바로 히라야마 아닌가. 히라야마의 일상이 평온하게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동료 청소부의 급작스런 퇴사로 인해 과로에 시달리는 히라야마의 평일, 술집 주인과 전남편의 재회를 목격하는 바람에 강가에서 맥주를 마시는 히라야마의 주말을 보여줌으로써 히라야마의 견고한 루틴이 언제든지 부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인공이 살아온 궤적을 과감히 소거하고, 주인공이 살아갈 행로를 불투명하게 만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은 주인공의 하루 뿐이다. 이를 통해 퍼펙트 데이즈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오늘이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나라는 존재를 정의한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오늘의 풍경을 필름카메라에 담으려고 정성을 다하지만, 필름을 인화한 다음에는 과거가 되어버린 사진들을 무심하게 상자에 던져버리는 히라야마의 모습과, '두 개의 그림자가 포개지면 색이 달라질까'하는 궁금증의 답을 미래의 과제로 미뤄버리는 대신 그림자 놀이를 통해 곧바로 찾아내려는 히라야마의 모습이 '지금, 여기, 현재'의 메시지를 은유하는 장면이지 않을까 싶다.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 여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삶이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굳이 설명하자면 히라야마는 철저한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출근길에 카세트 테이프로 올드팝을 듣고, 퇴근길에는 목욕탕과 지하상가의 노포에 들르고, 문고판 책을 읽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영화는 히라야마가 얼마나 충만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히라야마가 얼마나 '현대 일본'으로부터 괴리된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암시한다. 옛날 카세트테이프를 팔라고 권유하는 레코드샵의 직원, 나이든 사람밖에 없는 목욕탕, 히라야마 말고는 손님이 없는 서점과 사진관, 지하상가 건너편의 깨끗한 신식 지하철역, 스포티파이를 모르냐고 물어보는 조카, 하루아침에 허물어진 건물은 히라야마 반경 안의 세계와 히라야마 반경 밖의 세계 간 거리감을 나타내는 장치다. 영화는 현대 문명으로부터 동떨어진 히라야마의 삶이 행복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를 섣불리 '가치 판단'하거나, '히라야마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혹은 지양해야 한다'는 식의 고루한 교훈을 관람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슬픔의 눈물인지, 기쁨의 눈물인지 딱 잘라 판단하기가 불가능한 히라야마의 복합적인 감정을 영화의 마지막에 제시한다. 완전히 다른 세계 속 충만한 삶을 구축한 것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히라야마는 목놓아 울지 않는 것일까. 남들이 다 사는 세계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를 선택한 결과로서 찾아오는 외로움과 회의감에 무너졌기 때문에 히라야마의 눈가의 눈물이 맺히는 것일까. 히라야마의 눈물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곧 히라야마의 '완전히 다른 세계'를 향한 우리의 시선을 반영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