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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Sep 04. 2024

보도지침_오세혁

3가지 시간선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현재로, 주인공들이 법정에서 모여, ‘월간독백’에서 보도지침을 폭로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시간선이다.  두 번째는 과거로 사회초년생 시절 주인공들이 각자 밥벌이를 하던 도중 보도지침의 부당성을 자각하게 되는 시간선이다. 세 번째는 대과거로, 대학생 시절 세상 물정 모르고 순수했던 주인공들이 연극부에서 함께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선이다.  


역순행적 구조를 취한 이 연극은 주인공들 간 치열한 법적 공방을 중심 시간선으로 두면서 중간중간 장면을 전환하여 과거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따라서 이 연극을 보는 것은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것과도 같다. 연극 전반에 흩뿌려진 과거 장면들을 관객이 스스로 이어서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고, 과거 인물의 말과 현재 인물의 말 사이 연결고리를 이어나가야 비로소 주인공의 심정과 처지, 그리고 극의 메시지가 선명히 납득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인공들이 대학생이었던 시절, 연극부 선배가 주인공들에게 독백이 지닌 힘-자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용기내서 관객에게 외칠 수 있게 된다-을 설명하고, 주인공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햄릿의 독백을 연습하며 내면의 고뇌를 과감하게 선보이는 장면은 현재의 주인공들이 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신문의 이름을 월간독백으로 지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왜 검사와 변호사는 서로 악감정을 지니고 있을까.’ ‘왜 판사는 이 재판을 맡은 것에 큰 부담을 느낄까.’ ‘어쩜 저렇게 피고인들은 패배가 예정된 재판에서도 일체의 두려움 없이 당당할까.’ 극의 오프닝을 보면 생기는 수많은 의문점에 대한 해답은 극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모두 해소되고, 마침내 관객은 ‘왜’ 이 재판이 열리게 되고, ‘왜’ 자신이 방청객으로서 이 재판을 똑똑히 지켜봐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이 극이 관객에게 강렬한 흡인력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결말이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우선 결말이 억지스럽지 않고 현실적이다. 검사는 최후 진술의 순간까지도 자신의 변절을 반성하지 않고, 한때 친구였지만 지금은 적인 피고인과 변호사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매도한다. 판사는 한때 경찰에 잡혀간 대학교 후배들을 풀어주기 위해 무릎까지 꿇기도 했었지만, 독재세력에 반하는 판결, 즉 무혐의 처분을 내렸을 때의 뒷감당을 두려워해 피고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다. 검사측과 변호사측 모두에게 완전한 승리도 패배도 될 수 없는 꺼림칙한 판결이다. 

정의를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던 주인공들은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 대신 반드시 오늘의 뜨거웠던 현장을 기억해달라고, 월간독백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독백을 외친다. 그 어떤 아름답지 못한 지침에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결의와 함께 말이다.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고, 주인공은 노력을 인정받는다’는  해피 엔딩 대신 ‘주인공은 패배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독백은 계속될 것이다’라는 비장한 엔딩을 통해 주인공이 갈구했던 민주주의와 정의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 


보도지침은 소품, 조명, 무대장치를 절묘하고도 창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극의 내용을 관객에게 강렬하게 전달한다. 배우들은 관객을 ‘보도지침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이 아닌, 재판을 보러 온 방청객(일반인 혹은 기자)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관객은 오프닝 때 방청객의 신분으로 주인공이 재판을 받으러 등장하는 모습을 자신의 핸드폰을 통해 직접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 모든 공연에서 관객의 핸드폰 사용은 엄격히 금지된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는 상당히 이색적인 체험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또한 재판의 중요한 증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 신문사에 매일 아침 내려지는 보도지침의 존재를 주인공에게 처음 알린 신문사 직원들,은 무대 백스테이지가 아닌 관객석 사이에 앉으면서 대기하고 있다가 판사가 증인신문 시작을 외치면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온다. 이러한 요소를 통해 극은 이야기의 현장감과 관객의 몰입도를 배가시킨다. 


극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대 위에는 종이 뭉치들이 흩뿌려져 있다. 장면에 따라 언제는 연극부의 대본이 적힌 종이가 되고, 언제는 정부의 보도지침이 적힌 종이가 되기도 하는 이 종이 뭉치들은 그 존재 자체로 시대의 탄압에 날개를 꺾인 청춘들의 꿈, 시대의 탄압에 더이상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항 의지를 상징하며 무대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또 다른 중요한 소품은 바로 가면이다. 경찰에 붙잡혀 끌려간 대학생들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서로 다른 고민과 꿈을 지닌 4명의 주인공들은 흰색 가면을 강제로 쓰게 되면서 획일화된다. 개인의 정체성, 나아가 존엄성 자체를 짓밟아버리는 고문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장치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가면이라는 은유적 장치 때문에 굳이 고문 장면을 끔찍하게 묘사하지 않아도 충분히 관객이 고문의 폭력성을 느낄 수 있도록 무대에는 섬뜩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나아가 가면은 4명의 주인공들 간 엇갈린 미래를 암시하기까지 한다. 고문관은 주인공 3명의 가면을 벗기지만, 유복한 집안 출신의 주인공 1명은 ‘아직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엘리트가 될 기회가 남아있다며’ 가면을 벗기지 않는다. 결국 가면을 벗지 않은 1명은 변절하여 나머지 주인공을 배신하고 법정에서 검사로 등장하여 주인공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매섭게 몰아붙이게 된다. 가면을 쓰지 않은 자들, 즉 양심을 지키고 시대의 부조리를 진실한 눈으로 직시하는 사람들, 반대로 가면을 쓴 자들, 양심을 버리고 시대의 부조리를 외면하는 사람들, 이러한 상반된 삶의 방식을 극은 모두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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