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같이 마음이 어수선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뻔하고 부질없고 단조롭게 느껴집니다. 그런 날일수록 읽어야 하는 시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사물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 바로 오은 시인의 시 <그곳>입니다.
시의 전문을 실어보겠습니다.
<그곳>
거울이 말한다.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
형광등이 말한다.
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이다.
두루마리 화장지가 말한다.
술술 풀릴 때를 조심해라.
수도꼭지가 말한다.
물 쓰듯 쓰다가 물 건너간다.
치약이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변기가 말한다.
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라.
재치있는 시입니다. '번뜩이는' 통찰력이 담긴 시이기도 합니다.
거울은 우리의 겉모습만을 보여줄 뿐이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라는 거울의 따끔한 지적을 더욱 새겨듣고 싶어집니다.
형광등을 킬 때는 보통 우리가 혼자서 조용히 일에 집중해야 될 때가 아닌가요? 외롭고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 고독한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외부의 소음을 차단할 수 있는 시간이죠. '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입니다'라는 형광등의 위로가 유난히 다정하게도 느껴집니다.
별 생각 없이 두루마리 휴지를 마구 씁니다. 두루마리 휴지는 쉽게 돌돌 풀리고 말려집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술술 잘 풀리길 바란다는 마음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집들이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디 항상 술술 잘 풀리겠다는 보장이 있나요.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무책임함과 방심은 기필코 화를 부르게 됩니다. 술술 풀릴 때를 조심하라는 두루마리 화장지의 경고가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가장 생명력이 질긴 물체를 떠오르라고 하면 잡초보다 치약이 먼저 떠오릅니다. 아, 이제는 새 것으로 바꿔도 되겠지 생각해도 치약은 '나 아직 살아있어'라고 소리칩니다. 힘겹게 튜브를 비틀고 쥐어짜면, 기어코 나오고 마는 그 끈질긴 치약.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치약의 생존신고는 비장합니다.
물을 내리면 다시 물이 올라옵니다. 끝과 시작이 연결되고, 끝없이 흐릅니다. 이 모습을 우리는 매일 지켜보는데도, 왜 무언가 삐걱대고 틀어지고 엇나가면 모든 것을 송두리째 포기하려고 할까요. 실패한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이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고치면 되는 것인데도 말이죠. 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변기의 조언을 귀담아 듣기로 했습니다.
그곳. 뻔해보이는 그곳은 반짝이는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그 가치를 발견하게 돕는 이 시를 언제든지 꺼내보고 읽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