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로는 오은 시인의 <그>를 가져왔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음식을 먹고 소화하는 것에 비유함으로써, 감정의 본질을 드러내는 멋진 글입니다.
그는 먹는 방식으로 감정을 소화한다.
사람들은 보통 감정을 느끼거나 해소한다고 말하지,
감정을 먹고 소화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감정을 먹고 소화하는지,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고독은 씹는다
분노는 삼킨다
슬픔은 삭인다
실제로 그는 감정을 먹는군요.
고독을 잘근잘근 씹습니다.
분노는 꾸역꾸역 삼킵니다.
슬픔은 꿋꿋하게 삭입니다.
고독을 씹고, 분노를 삼키고, 슬픔을 삭임으로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그가 존경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고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는,
슬픔을 눈물로 씻어내리지 못하는
그가 측은해지기도 합니다.
분명 화자는 그가 먹는 방식으로 감정을 '소화'한다고 했는데,
의구심이 듭니다. 감정이 얹혔을까요. 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기쁨은 마신다
희망은 들이마신다
사랑은 빨아들인다.
다행히 그는 고독, 분노, 슬픔만을 먹으며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기쁨과 희망을 마시고, 사랑을 빨아들입니다.
하지만 또 걱정이 됩니다.
고독을 씹고, 분노를 삼키고, 슬픔을 삭이는 시간은 길지만,
기쁨과 희망을 들이마시고, 사랑을 빨아들이기는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짧습니다.
음료로 포만감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소화될 필요가 없는. 몸에 에너지를 두둑이 채워넣지도 못하는.
그렇게 너무나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쁨, 희망, 사랑.
'그'에게 남는 것이 있을까요.
뼈를 깎는 고통을
다시 뼈와 살로 만든다
살맛이 난다
그는 고통이 뼈를 깎는다면, 고통을 뼈와 살로 만들어버립니다.
'자신의' 뼈와 살로 만든다고 해야되겠죠.
그에게 고통은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고통은 그라는 존재의 일부가 됩니다.
그의 몸은 고통마저 먹습니다.
'사는 보람과 재미를 느끼다'의 살맛나다가 아닙니다.
그는 살의 '맛'을 맡습니다.
먹으면서도 온통 먹을 생각뿐이다
감정의 소화 때문에 늘 헛헛하다
그를 향한 걱정은 '괜한' 오지랖이 아니었습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는 모든 감정을 씹고 마시고 삼키며 '맛봐야' 합니다.
고독을 씹고, 분노를 삼키고, 슬픔을 삭일 때는.
기쁨과 희망을 마시고, 사랑을 빨아들여서 고독, 분노, 슬픔을 소화하고 싶다고 생각할 터이며
기쁨과 희망을 마시고, 사랑을 빨아들일 때는
뱃속의 고독, 분노, 슬픔을 떠올리며 그 감정들이 무탈하게 소화되길 바랄 것입니다.
먹으면서도 온통 먹을 생각뿐일 것입니다.
온통 감정 생각 뿐인 삶. 다시 말해, 감정 외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삶.
그 감정마저 자기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삶.
그는 늘 헛헛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아도 써도 삼킨다
달콤하면서 쌉싸래해도
절대 뱉지는 않는다
그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감정을 먹는다
애달프게도 그는 편식을 하지 않습니다. 단 것 쓴 것 달면서 쓴 것 가리지 않고 다 먹습니다.
편식을 하지 '못한다고' 해야 더 적절하겠죠.
삼킨 다음 토해내는 감정은 있어도, 처음부터 뱉을 수 있는 감정은 없습니다.
모든 감정은. 나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은 채 잔인하리만치 골고루 우리의 밥상 위에 올라옵니다.
어디 기쁨만 들이마시는 삶이 있나요. 어디 고독만 씹는 삶이 있나요.
그는,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을 먹고 소화하며, 감정에 사로잡힌 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