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심리는 다 비슷비슷하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포털사이트에 검색하고, 더 궁금하면 커뮤니티에 가입한다. 나도 처음 가슴에 멍울이 잡혔을 때 네이버에 검색을 했고, 엉뚱한 답변에 안도하며 몇 달의 시간이 버렸다. 암을 진단받은 이후에는 유방암 관련 카페에 가입을 했다. 다들 그런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하다.
암 관련 커뮤니티에는 암에 걸린 당사자 또는 가족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병과 치료약에 대해서 다들 논문이라도 작성할 듯한 열의로 공부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교수님이 알려주지 않은 여러 이야기도 카페에서 처음 접했다.
그중 핫한 단어는 '삼중음성 유방암'이었는데 유방암 종류 중 가장 무서운 종류라 다들 피하고 싶어 하는 암이었다. 병원에서 교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 교수님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아서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암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니 불현듯 불안해졌다.
방사선 치료를 매일 받고 있던 시기여서 교수님을 만나는 진료일은 한참 뒤라 직접 검사결과지를 보고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험사에 제출하기 위해 떼어둔 검사 결과지는 다 영어로 되어 있는 데다가 의학용어라 봐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카페에 사람들이 올린 정보와 이것저것 검색해서 확인해보니, 이런 맙소사, 또 당첨이다.
암을 유발하는 특정 호르몬 종류 중 세 가지가 음성으로 나오면 삼중음성 유방암인데, 이 암은 공격성이 매우 강하고, 재발률이 높으며, 예후가 나쁘기로 유명했다. 특히 재발을 하면 그땐 항암제도 잘 듣지 않는 악질이라고 한다. 실제 카페에 있는 여러 환자들 중 삼중음성 유방암 환자들의 재발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아 불안은 더욱 증폭되었다.
교수님은 왜,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환자에게 해주지 않으신 걸까. 병원에서 아무것도 들은 게 없으니 카페에 있는 정보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거기 있는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불안하고, 우울해졌다. 특히 병원에서는 한 번도 나보다 어린 환자나 또래의 암환자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 카페에는 젊은 환자들이 넘쳐났고, 그들의 재발률은 정말 높았다. 모든 항암치료를 다 끝내고 사회로 돌아갔는데 몇 달만에 재발해서 다시 암 투병 생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들이 꽤나 많았는데, 그런 스토리의 주인공은 대부분 2-30대 여성들이었다. 역시 암은 젊은 사람에게 훨씬 더 위협적이다.
자꾸 그런 스토리에 노출되다 보니 그들의 현실이 곧 나의 미래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병의 치료는 마음가짐도 중요한데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날로 카페를 탈퇴했다. 내가 병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치료는 의사 선생님이 해주시는 건데 그분을 전적으로 믿기로 했다. 이후에 교수님을 만나는 진료일에 내가 삼중음성 유방암이 맞는지 여쭤보았더니, 맞다고 하셨다. 이게 많이 나쁜 거냐고 물어보니 '나쁠 수도 있고, 나을 수도 있다'는 애매한 답변을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랬다.
보통 유방암은 여성호르몬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항암 치료가 다 끝나고도 치료약과 호르몬 억제제를 먹는 경우가 많다. 호르몬 억제제는 여성 호르몬의 분비를 막는 약이기 때문에 젊은 환자가 먹으면 폐경이 온다. 암을 막기 위해 2-30대 여성도 폐경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폐경이 되면 임신과 출산이 불가함은 물론이고, 갱년기 증상을 몇십 년 일찍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중음성 유방암은 암의 발생이 호르몬과 무관한 암이어서 호르몬 억제제를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 재발만 하지 않는다면 더 나은 부분이 있는 게 맞았다. 좀 무섭고 위험한 암 이긴 하나 당장 더 편한 부분이 있는 것도 맞으니 일단은 호르몬 억제제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위안 삼기로 했다.
불안함을 가득 안고 있는 여러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나를 치료해주시는 선생님 말씀 하나만 붙들고 가는 게 심리적으로 훨씬 도움이 됐다. 불안과 공포같은 감정은 쉽게 전염되니까 그런 커뮤니티는 부정적 감정을 전염시키기 쉬웠다. 역시 카페를 탈퇴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 1년 3개월 이상 지난 어느 날, 여전히 가발을 쓰고 다니긴 했으나 내 머리카락도 꽤나 많이 자랐다. 머리숱이 많고 모발이 뜨는 스타일이라 내 머리가 커트머리 기장으로 자라나자 가발을 쓰는 데에 불편함이 생겼다. 사자머리 같은 내 모발 위에 가발을 쓰니 가발이 덜 밀착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제 슬슬 가발과 이별할 때가 되었지만 기장도 헤어스타일도 너무 애매해서 조금 더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마 후 드디어 가발을 벗었다.
가발은 추가 구매한 것까지 총 4개였는데 일단 세탁해 박스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 엄마는 내 방에 들어올 때마다 가발 박스들이 보이는 것이 눈에 거슬렸는지 버리든지 팔든지 하라고 하셨다. 매일 쓰던 가발은 엉킴이 있어 버려도 될 것 같았고, 나머지 3개는 너무 새거라 버리기엔 아까웠다. 그렇다고 팔자니 암환자가 쓰던 패션 가발을 누가 사려고 할까 싶었다.
며칠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젊은 암환자에게 기부하자'였다. 형편이 어려워 여러 가지 가발을 사기 힘든 젊은 암환자를 찾아서 나눠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환자를 고집한 것은 내 가발을 중년 여성들이 쓰기엔 스타일이 맞지 않고, 기왕이면 또래의 환자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는데 과연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할지는 확신이 없었다.
조건에 맞는 환자를 찾기 위해 1년 만에 유방암 카페에 다시 가입했다. 그리고 가발 사진을 정성스레 찍어 나눔 글을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다. 모두에게 뭐라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선착순 3명에게 확인 댓글을 달고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달라고 했는데, 그중 한 명에게 따로 연락이 왔다. 혹시 직접 만나서 받아도 되냐는 것. 택배비는 모두 내가 부담한다고 했는데, 직접 만나자는 건 나를 만나고 싶은 건가 싶어 약속을 잡았다.
며칠 후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30대 초반 내 또래의 기혼여성이고, 항암 치료 중이었다. 림프절 전이가 있는 2기 환자였고, 현재 돌이 갓 지난 아이가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심정이 어떤지 너무 잘 아니까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그녀는 내가 치료를 잘 마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사람 같아서 만나서, 그 기운을 느껴보고 싶어 왔다고 한다. 아마 가발 나눔 글에 댓글을 단 사람들 대부분 가발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다 나은 사람의 기운이 담긴 부적처럼 내 물건을 갖고 싶어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요즘 카페 글에 재발했다는 사람들 이야기가 너무 많아 우울하다며 도대체 다 나아서 멀쩡한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냐고 묻길래, 내가 대답했다.
"다 나은 사람들은 카페에 있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세상 속에서 바쁘게 살고 있거든요."
나도 딱 1년 전에 카페를 보면서 우울했고, 바로 탈퇴한 후에 치료를 잘 끝냈고, 지금은 누구보다 바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커피숍에서 우리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남편도 친정어머니에게도 속 마음을 터놓을 수 없어 그동안 많이 답답했다고 한다. 자신이 치료를 받느라 어린아이를 친정어머니와 남편이 돌아가며 돌보는데 그런 상황에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미안해서 아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녀도 외로운 섬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다들 제각각 다른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무게를 버티고 살아가고 있었다.
커피숍에서 나와 두 손을 잡고 앞으로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녀는 눈시울이 빨간 상태였는데 나도 순간순간 울컥했다. 그녀는 또 연락해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언제든 연락해도 된다고 하며 우리는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나의 안녕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이 힘들어지는 날 그녀와의 만남을 다시금 기억한다.
'나의 안녕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가 된다. 나는 행복해져야 한다.'
수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어딘가에게 건강하게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