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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소금 Sep 17. 2022

06. 바다 소금


 감시 림프절 제거 수술 부위를 다시 절제한 이후 2주 동안 인간 봉제인형의 시간이 지나갔다. 2주 동안이나 벌어져있던 피부는 그동안의 방사선 치료로 조금 딱딱해져 있어 봉합이 쉽지 않다고 하셨다. 펠로우 선생님은 최대한 예쁘게 꿰매 주고 싶은데 상황이 이래서 상처가 조금 미워질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셨다. 거기다 봉합을 했는데도 며칠이 지나도록 피부가 서로 붙지를 않아 자꾸 틈이 생겼고, 몇 차례 추가로 꿰매가며 겨우 살을 붙였다. 처음 수술 때는 실로 꿰매지 않고 외과용 본드로 붙여놓아 수술 자국이 매우 깔끔했는데 이 일로 인해 나는 예정에 없던 큰 흉터를 갖게 되었다. 


 초긍정의 힘으로 버티던 나는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방사선 치료를 오랫동안 중단할 수 없어 상처 회복이 다 되지 못했지만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항생제 좀 그냥 처방해줬으면 이 생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 응급실에서 만난 외과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상하게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은 금세 화로 바뀌었다. 지금 내가 우울한 게 다 그 사람 탓인 것만 같고, 상처를 볼 때마다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식구들도 베프도, 아무도 몰랐지만 그 당시 나는 엄청난 마음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쯤 되니 마음의 위기 상황이라 그런지 3인칭 모드가 다시 발동했다.



- 이봐. 지금 힘든 건 알겠는데 그 사람 미워하면 뭐가 달라져? 그분은 검사 결과대로 한 거잖아. 몰라서 실수한 거라잖아. 네가 의료소송을 건다고 해도 승소할 확률이 1도 없는 그냥 운이 나빴던 그런 상황이야. 화낸다고 이미 난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바꿀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선 더 이상 화내지 마.

-그냥 화가 난다고.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상처만 보면 다시 떠오르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 바다는 말이야. 염분 때문에 썩지 않아. 그런데 염분이 몇 % 들어있는 줄 알아? 평균 3.5%정 도래. 고작 3%의 염분이 그 넓은 바다를 썩지 않게 만든다고. 넌 네 안에 희망이 몇 퍼센트 남아있는 것 같아? 아무리 적어도 3퍼센트보다는 훨씬 많지? 

- 그것 보다야 훨씬 많겠지.

- 그럼 됐네. 너에게 최소 3퍼센트의 희망만 있어도 너는 좌절하지 않을 수 있어. 너는 이미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너답지 않은 화는 갖다 버려. 그런 도움도 안 되는 감정 들고 있어 봐야 너만 피곤해. 그냥 놔버려. 

- 그래. 놔버리자.... 화내지 말자......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도 화를 품는 것도 결국 나만 고달팠다.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불덩어리 같은 감정을 마음에 품고 있으니 편할 리가 없었다. 바꿀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선 하루라도 빨리 마음을 내려놓아야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늘 생각한다.


"내 안에 단 3%의 희망만 있어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평탄한 일상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1도 와닿지 않을 말이지만, 마음도 상황도 자꾸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에게는 뭐라도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수술 상처는 덧났지만 마음만은 덧나지 않도록 나를 스스로 다독여야 했다. 다행히도 이 방법이 꽤나 효과가 좋았다. 속상한 마음은 완전히 없앨 수 없었지만 적어도 원망과 화나는 감정을 비워낼 수 있었다. 암 투병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나를 스스로 달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주간의 치료 중단 이후 다시 찾은 핵의학과 교수님. 교수님은 큰 흉터가 남은 상처를 보시더니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한마디 건네셨다.

"뭐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의사들끼리 하는 말이 있어요. 속썩인 환자가 예후는 좋다고. 

앞으로 다 괜찮을 테니 걱정 말아요."

"위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피식)" 

내가 속썩이는 환자라는 게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후가 좋을 거라는 말은 믿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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