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초가 가진 따뜻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흐린 날은 양초부터 켜고 저녁이면 조명을 켜두고 양초도 둔다. 주로 5시간 정도 타다가 스스로 꺼지는 티라이트 양초를 애용한다. 산책에서 주워온 나무껍질이나 밤송이 안에 양초를 넣어 장식하거나, 양초 유리잔에 넣으면 유리색에 따라 빛이 흘러나온다. 혼술 하며 책을 읽을 때, 책상에서 작업할 때도 켜둔다.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하며 불을 밝히는 나만의 의식이다. 향이 있는 양초보다는 무향의 흰색과 밀랍양초를 선호한다.
연말이라며 이웃이 양초를 선물해 줬다. 선물을 내밀 때부터 어느 브랜드의 양초인지 알 수 있었다. 양초 하면 이젠 대중적인 선물용인 양키캔들의 향기는 구만리에서도 맡을 수 있을 만큼 향이 짙다. 런던에 머물렀던 동안 백화점 근처를 지나다 보면 양키캔들의 향기와 러쉬의 비누향기가 뒤섞여 많은 상점들 가운데서도 단연 눈보다 코를 먼저 자극하는 매장이었다. 지금은 두 브랜드가 국내에도 즐비하지만 당시는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양초를 살짝 만지고 돌아서기만 해도 그 향기가 오래 남아, 만지는 것조차 꺼려했었다.
선물 받은 양초를 열어보니 화이트, 블루, 블랙 세 가지가 담겨있었다.
화이트는 재스민향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은은함이 있다. 중국출장을 다녀온 친구가 사 온 재스민차에서 처음 향을 맡았다. 따뜻한 물에서 움츠린 잎이 기지개를 켜며 피어나는 재스민의 향과 첫맛을 기억하고 있다. 발리여행지가 떠오르는 재스민의 향기는 동양적인 절제미와 우아함을 담은 향기로 남아있다.
블루의 향기를 맡자 열대나라의 바닷가 앞에 있는 상상이 되었다. 망고 즙이 뚝뚝 떨어지고 망고스틴을 손으로 까먹으며 이렇게 맛있는 과일이 있었냐며 감탄한다. 뜨거운 태양아래 하얀 모래에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푸른 물로 뛰어들면 놀란 열대어들이 재빨리 도망가고 나는 수영을 한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싶어 지게 만드는 향기였다.
마지막으로 손에 잡은 건 블랙이었고 짙은 향에 음.. 하고 할 말이 없어 뚜껑을 닫았다. 기분 좋게 동남아의 바닷가에서 머리에 꽃을 달고 있는 나를 상상하게 한 향기는 마지막 블랙을 맡자 확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향기였다.
먼저 재스민 양초를 껴서 향기를 즐기고 30분 정도만 켜두었다. 너무 짙은 향기는 밥냄새와 충돌하면 곤란하니 향초는 주로 저녁을 먹고 환기를 하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한 후 잠시만 켜두었다. 그렇게 재스민의 꽃향기와 푸른 바다의 향기는 몇 달에 걸쳐 조금씩 타들어가며 사라졌다. 두 개의 양초를 다 쓰고 남은 블랙 양초는 어디로 갔는지 잊어버렸고, 서랍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일 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발견했다.
비닐을 아직 뜯지 않았는데도 그 강렬한 향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비닐을 뜯고 남편의 화장품 쪽에 같이 두었다. 작은 양초는 얼마나 향기가 짙게 묻어나던지 난 코를 감싸 쥐고는 다시 화장대 서랍에 집어넣었다. 다시 꺼내 화장실에 두었다. 다시 거실로 옮겼다. 소파에서 책을 읽는데 멀리 둔 양초의 향기가 스멀스멀 나에게 온다. 정말 끈질기고도 강렬한 향기다. 버리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고 어디 두지도 못하고 양초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블랙 양초 향기를 맡으면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춤바람 난 아저씨가 내 앞을 지나가는 듯하다. 머리를 반들거리게 쓸어 올리고 무늬가 화려한 셔츠를 입고는 담배를 멋들어지게 폈는데, 촌구석에서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춤바람 나서 여편네 속만 터지게 한다며 한 마디식 거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농담 섞인 인사를 하고 자신감 있게 걸어가며 짙은 스킨로션 화장품 냄새를 풍겼다.
나는 블랙 양초에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 궁금해 양초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았다. 머스크, 패추리, 세이지, 마호가니 코롱. 남자의 향기를 가득 담은 단어들이었다. 짙은 블랙은 담배를 입에 물고 저 멀리 데이지의 집을 바라보던 '위대한 개츠비'의 영화장면이 떠올랐다. 멋진 단어들이 가득한 성분을 소리 내어 발음해 봤다. 머스크 패추리 세이지 마호가니 코롱. 춤바람 난 동네 아저씨 향기에서 위대한 개츠비 이미지로 금세 바꿔졌다.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강한 향기가 부담스러워 밀봉하고 다시 서랍 속에 양초를 넣어두었다.